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6)
최근 우리는 성육신이라는 주제를 교제했다. 이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 ‘내려놓기’의 실행과 관련된 주제로서, ‘하나님과의 간극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는 것’ 중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 내려놓기’까지 교제했다. 이 내용은 이미 몇 차례 교제한 바 있다. 주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관해 교제했는데, 이 측면의 내용을 우리는 두 가지 주제로 나누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이었는지 대답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입으신 육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두 가지 올바른 실행 원칙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늘의 하나님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패괴된 인간과 견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주제에 관해 구체적인 내용들을 교제했는데,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중 성육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생존하며 처신하고 역사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원칙들을 준수하고 엄수하는지에 관해서도 교제했다. 이 내용에 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깨닫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주로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이라는 주제에 관해 교제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많이 다루었다. 듣고 나서 효과가 어땠느냐? 성육신에 대한 관념과 상상이 줄었느냐? 아니면 새로운 관념이 더 생겼느냐?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이 줄었습니다.) 이 측면의 주제에 관해 교제하는 것이 사람이 성육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의 구체적인 표출과 행동을 위주로 교제했다. 이로써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특수한 신분을 가진 사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이해할수록 그는 대단한 것이 없는 그저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이해할수록 그에게서 하나님의 느낌을 받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느냐? (아닙니다. 성육신의 실제적인 살아냄과 표출에 대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 예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형상만 평범하고 정상적일 뿐 저희 인간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정상 인성을 표출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정상 인성 속에는 패괴 성품이 없습니다. 교만하거나 간사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거만함이나 방종함도 없습니다. 성육신은 겉으로는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낮추심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유명인이나 위인 그리고 능력 있는 거물이 자신의 여러 면을 소개할 때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하고 일반적인 면을 소개하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패괴된 인간이 자기소개를 통해 남들에게 자신을 알릴 때는 절대 자기가 얼마나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정상적인지 소개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는 자기소개나 자신의 언사를 통해 자기가 남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비범하고 위대하며 초인적인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더 나아가 그가 초능력자인 줄 아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더없이 기뻐할 것이다. 패괴된 인간이 자기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아라. 먼저 그는 자기가 얼마나 완벽한 사람인지 소개하면서 자기에겐 아무런 결점이나 흠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정 환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기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지, 자기 학력이 어떻고, 외모의 어떤 점이 남보다 뛰어난지 뽐낼 것이다. 얼굴에 점만 하나 있어도 남다른 설명을 만들어 낸다. “여기 좀 보시죠. 저는 점도 흔치 않은 곳에 납니다. 여기에 점이 있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면 귀인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는 이목구비 중 어디가 되었든 자기 외모에 대해 언급할 때면 남들과 어떻게 다른지, 관상학적으로 어떤 좋은 속설이 있는지 큰 소리로 떠들려 한다. 예를 들면 귀인이 아니면 부자다, 빨리 출세한다, 남의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등의 속설 말이다. 또한, 그는 특정 분야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사나 특기를 뽐내길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그의 사고나 생각이 얼마나 출중하고 남다른지, 자기가 어떤 집단에서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높으신 분이 자기를 얼마나 칭찬했고, 자기를 얼마나 중시하면서 부러워하고 자기에게 탄복했는지, 혹은 자기가 어떤 업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상관이 자기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뽐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는 자신의 모든 측면을 남달라 보이도록 소개한다. 여러 사람 중 유일하고 독보적이며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보다 출중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내려다봐야 하는 미천한 서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누구보다 위대하고 존귀하며 비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학력을 물으면 그는 명문대를 졸업해서 석박사 코스를 밟았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평범한 대학 출신이다. 그는 자신의 결점이나 흠, 그리고 패괴 성품, 저급한 인격, 과거의 잘못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 남한테 본인을 알리고자 자기소개할 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기를 뽐내고 칭찬하며 포장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을 무척 위대하고 출중하며 비범하다고 소개한다. 병에 걸려도 자기가 잘 먹고 잘살아서 걸린 병이라고 하면서 남들이 자기가 남다르고 귀한 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어쨌든 그는 절대 자기가 사람들 눈에 평범한 사람, 일반적인 사람으로 비치지 않게 한다. 그러기보다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앙망하고 우러르며 탄복하게 한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고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지위가 생긴다면 그는 더욱 흐뭇해할 것이다. 네가 그에게 평범하고 정상적이라고 한다면, 또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한다면 그는 체면이 깎이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것이다. 그는 평생 남다름, 출중함을 추구하며 살았다. 패괴 성품과 이런 욕망을 지니고 있다 보니 많은 사람이 항상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대단하고 품위 있게, 그리고 존귀하게 꾸민다. 그래서 겉모습이나 언행에서 무척 거물의 풍모를 풍긴다. 그는 어떤 집단에서든 자기에게 “사람들 속에서 당신이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당신의 눈빛과 이목구비, 기품을 통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았죠.”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한없이 부풀려 평생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여기저기서 자랑할 것이다. “무리 속에서 한눈에 알아보더라니까요. 제가 리더 감이고 다른 사람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걸요!” 그는 이런 사람이 되는 걸 무척 좋아하고 자신을 출중한 사람, 범상치 않은 사람, 남다른 사람, 더 나아가 독보적인 사람의 지위에 올려놓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또 많은 사람이 사회의 유명인이나 위인, 지위와 신분이 높은 사람을 주목하면서 그들의 소식이나 그들의 언행과 의식주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재미를 목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모방하고 따르려고 주목하는 것이다. 그들이 먹고 입는 것, 그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은 죄다 따라 하고, 그들의 이야기 주제마저 따라 한다. 그것도 거의 실시간으로 말이다. 자기가 전반적인 사회 조류에서 도태될까 봐 몹시 걱정되고 자기가 낙오해서 남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걱정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걸출한 사람, 비범한 사람이 될 생각만 하고,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은 절대 되려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질이 그저 그래서 별다른 특기나 은사가 없고, 각 측면의 선천적 조건도 평범하고 일반적인데도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무척 대단하고 품위 있는 사람인 척하거나 자신을 범상치 않은 사람,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심지어 거물을 따라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 능력 있고 수완 있는 사람이나 재주가 월등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며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살펴보고는 자기도 따라 한다. 평범한 보통 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처럼 출중한 거물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에 관해 교제하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얼마나 남다르고 출중하며 위대한지 온 힘을 다해 자랑하고 포장하며 과시하기 바쁜데, 자기가 얼마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지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니 조금 비상식적이지 않나요? 너무 순진하신 것 아녜요? 성육신한 그리스도이시면 그 얼마나 존귀한 신분인가요? 또 머리 위에는 얼마나 큰 광채와 면류관이 있습니까? 어찌 스스로를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실제적인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게다가 혹여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봐 자신이 얼마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지 그렇게나 많은 예시를 들어가며 증명하셨어요. 아무래도 사람으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사람의 관념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측면의 구체적인 표출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니 날조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대단하고도 위엄 넘치는 신분과 이미지가 느껴질 만한, 남다르고 비범한 사례도 어느 정도 들어 주셔야죠.” 내가 보니 너희에게 실망을 안길 것 같구나. 정말 그런 사례는 없다. 사실 내가 말한 생활과 사역에서의 처신과 일 처리에 관한 내용은 성육신의 진실한 표출이다. 이렇게 객관적인, 이런 실상이 전부다. 남다르고 비범하며 위대하거나, 이미지가 대단해 보이고 체구에서 위엄이 드러나는 사례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꾸며낼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게 그들의 마음에 좀 더 좋은 인상을 남겨 주세요. 스스로 그렇게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고 하면서,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면 대단하지 않은 이미지잖아요! 그럼 누가 숭상하고 우러르겠어요? 다들 우러르지도 않고 숭상하지도 않는데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겠습니까?” 잘 들어라. 나는 정말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 네가 날 우러르지 않고 숭상하지 않는다면 내겐 정말 좋은 일이다. 더없이 자유로울 수 있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우러르지도 않고 숭상하지도 않는다면 그걸 하나님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나를 우러르든 말든 숭상하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네가 나를 우러르지 않고 숭상하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모든 말과 내가 교제하는 모든 측면의 진리를 마음을 다해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그 말에 따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내가 말한 보람이 있으니 말이다. 네가 나를 우러르지 않고 숭상하지 않더라도 내가 한 말과 내가 한 설교가 너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 진리를 추구하는 법, 일이 임할 때마다 그 일을 진리 원칙대로 처리하는 법을 알게 해준다면, 또 네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법,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하며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법을 알게 해준다면, 더불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을 알게 하여 마침내 네가 패괴 성품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에게 얻어지게 한다면, 내가 말한 보람이 있을 것이고, 내가 말한 목적도 이루어질 것이다. 나를 대하는 것은 그저 올바로 대할 수 있으면, 즉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원칙에 따라 대할 수 있으면 된다. 너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예전에 우리가 함께 지내기 위한 세 가지 원칙에 관해 교제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를 솔직하게 대할 것, 그리스도를 존중할 것, 그리스도의 말을 들을 것이 그것이다. 너희는 이 세 가지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사람의 숭상이 필요 없고, 사람의 앙모나 우러름도 필요 없다. 그리고 사람이 마음에 내 형상을 품는 것도 필요 없다. 난 이런 것들에 흥미가 없다. 많은 사람이 대단하고 남다른 이미지에 출중한 능력을 겸비한 비범한 인물을 무척 숭배하다 보니 성육신은 정상적이거나 실제적이며 평범한 인자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본 적 없는 사람은 자연히 내가 보통 사람보다 대단하고 무척 위엄이 있는 이미지인 줄 안다. 이런 생각은 금물이다. 나는 전혀 위엄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체구도 작고 키도 꽤 작다. 일상에서 하는 말과 행동도 무척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옷, 화장, 의식주 등 여러 면에서 난 무척 평범하다. 유일한 나, 독보적인 나를 결코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규범을 지켜 일을 처리하고, 본분에 맞게 처신하는 것, 제대로 사역하고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 해야 할 말을 설파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을 추구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다. 나는 인간처럼 남다른 사람, 출중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 사람 속에서도 남들이 한눈에 알아봐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네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전혀 마음 아프거나 괴롭지 않고 망신이라는 생각도 결코 들지 않는다. 물론 너더러 무례하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사역하며 너희와 접하면서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또 어떤 측면의 문제를 교제하여 해결하든, 혹은 일상사나 어떤 일에 관해 떠들든 나는 너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노력한다. 그리고 어떤 일에 관해 이야기하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힘쓴다. 물론, 교제가 진리 측면의 문제와 관련된다면 더더욱 사람이 거기에서 진리의 실행 원칙을 얻게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게 한다. 이럴 때 일상적인 이야기를 조금 나눈다면 더 정상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상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상 인성이 필요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느냐? 사람은 때로 일상에서 보고 들은 것을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나눠야 한다. 일상적인 일에 관해 떠들고 한담하며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이 모든 것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이런 나눔은 네게 세상, 사회, 인간을 좀 더 이해시키고, 사회와 인간 가운데 생기는 일들을 바라보는 법, 사악한 풍조와 각종 사물,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인식하는 법에 대해 알려주는 것일 때가 더 많다. 설사 한담이나 일상적인 대화라고 하더라도 사람이나 일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이따금 혹은 가볍게 다루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이 나를 만나면서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은 전혀 비범하지 않다. 전부 정상적이며 실제적이고 평범하다. 이런 인성과 모습으로 사람과 함께 살면서 나는 무척 자유롭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네가 만약 내가 어떤 비범하고 남다른 행동을 한다거나 내 이목구비나 다른 어떤 면에 무척 출중하고 남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이나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나를 처음 만나면 나를 관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내 시선, 내 이목구비를 뜯어보고 내 말의 단어나 어조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듣는다. 내가 자기 생각대로 그렇게 출중하고 남다른지 살펴보고 싶은 것이다. 잘 들어라. 그럴 필요 없다. 관찰할 필요도 연구할 필요도 없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편안하고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네가 관찰하고 연구만 한다면 연구할수록 지치고 막연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네 연구와 관찰의 대상이 되면 너를 점점 싫어하고 네게 반감을 가질 것이다. 네가 어떻게 연구하든,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기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연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느냐? 네 연구만 더 역겨워질 뿐이다. 예전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날 일정 기간 관찰한 것인지 아니면 무심코 본 것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 빛이 있다며 한눈에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봤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또 무엇을 알아보았느냐?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느냐? 내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것을 보았느냐? 내 몸 전체가 빛줄기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느냐? 내 손에 철장이 들려있는 것을 보았느냐? 내 눈에 빛이 있다는 네 말은 틀렸다. 성경에는 ‘불꽃 같은 눈’이라고 쓰여 있다. 네가 이해한 대로라면 너는 내게서 불꽃 같은 두 눈을 보고 하나님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야 했다. 빛이 있는 것만 봤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대답해 보아라. 이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느냐? 이는 분량이 작은 모습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잘 들어라. 이런 것들을 관찰하거나 연구할 필요 없다. 내가 선포한 말씀만 들어도 충분히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구원의 길에 오를 수 있다. 네가 굳이 관찰하려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느냐? 아무런 결과도 없을뿐더러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데다가 하나님에 대한 관념도 점점 심해질 것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말한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참모습, 그리고 <계시록>에서 하나님이 예언한 하나님의 형상이나 인간이 과거 기록을 통해 본 하나님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네가 아무리 관찰해 봤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네게 출중하고 남다른 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관찰하지 말고 연구하지도 말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네가 연구할수록 하나님은 네게서 멀어질 것이고, 네가 연구하지 않고 순순하게 순종하며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성령이 너를 깨우치고 네게 빛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할 것이다. 네가 늘 관찰하고 연구한다면 성령은 너를 버릴 것이다. 성령이 너를 버리면 너는 두 눈이 어두워져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고 무슨 일이 임해도 간파하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또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도 어디서부터 운을 떼야 할지 모를 것이고 예전에는 할 수 있었던 가장 간단한 일도 이젠 하려 하면 난감해지고 쩔쩔매게 될 것이다. 이러면 낭패다. 이것이 좋은 징조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니 이런 징조가 있으면 당장 고개를 돌리고 다시는 관찰하거나 연구하지 마라. 이런 징조가 없더라도 그래선 안 된다. 왜 그러면 안 되겠느냐? 그 길은 올바르지 않으니 네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며 가야 할 길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관찰하거나 연구하고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경우, 네가 본 적이 없어 성육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면 처음 만나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상이다. 그렇게 살펴보고 나서 어느 정도 인상이 생겨 설교 녹음으로 듣던 목소리와 대조해 보고는 ‘성육신 하나님은 이런 외모에 이런 체구, 이런 옷차림이었구나. 정말 정상적이고 실제적이고 평범하시네. 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셔. 하나님 말씀과 똑같아.’라고 생각하는 건 괜찮다. 여기까지만 하고 더는 마음속으로 이 일에 대해 연구하려 애쓰지 마라. 그 뒤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교제하고 있는지 경청하면서 하나님이 교제하는 내용이 어떤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는지 생각해 보고 즉시 기록해 두어라. 그러고 나서는 마음을 다해 묵상하고 깨달은 다음 실행해라. 이것이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올바로 대하는 길이다. 내가 어떤 내용을 어떻게 교제하든, 그 교제가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관련되면 나는 늘 너희가 하나님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모습을 인식하게 하지, 출중하고 위대하며 독특하고 남다른 쪽으로 연상하거나 인식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모든 일이나 사례는 전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모습이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다. 절대 내가 남다르고 출중하며 위대하다거나, 지도자의 풍모, 위인의 도량이나 품격을 가졌다거나, 위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오해하도록 사실을 조작하지 않는다. 잘 들어라. 나는 무엇을 경지나 품격이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고 그런 쪽으로는 고민하거나 마음을 쓰지도 않는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고민하겠느냐? 어떤 주제로 교제해야 너희가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지, 어떤 주제로 교제하면 너희를 독려하고 인도하며 도와주고 지도해서 너희에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와 각오가 생길지, 그래서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는 늘 어떤 주제로 어떤 설교를 하면 사람이 구원의 길을 걷고 본분 이행에 합격해서 진정한 피조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어떤 측면의 주제에 관해 교제하든 너희가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을 수 있게 힘쓴다는 말이다. 나는 결코 어떤 말을 해야 너희가 나를 우러르고 어떤 일을 해야 너희가 나에게 탄복해서 유명인이나 위인처럼 나를 심오하게 여길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내 마음속에 없다.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투를 쓰며, 스스로를 어떻게 꾸며야 너희가 나를 대단하고 심오하게 여기고 범접하지 못할지, 그리고 너희가 무척 보잘것없고 무지하게 보일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또 나의 지위나 이미지, 신분을 지키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지도 않는다. 오직 내 직분을 이행하는 데 전념할 뿐이다.
나는 고단할 때면 형제자매가 지내는 곳을 둘러보곤 한다. 때로는 농장을 산책하면서 채소밭을 둘러보거나 돼지와 양을 살펴보기도 한다. 또 고양이가 보이면 쓰다듬거나 안아 주면서 말을 걸기도 하고, 강아지가 보이면 너무 귀여워서 안아주기도 한다. 새끼를 열 마리 넘게 낳은 암캐 한 마리가 있었는데 공이라도 세운 것처럼 사람 앞에서 무척 신났길래 칭찬해 주었다. “좋겠구나. 네가 낳은 아가들 좀 보려무나. 이렇게나 많단다. 네 공이 크구나. 훌륭해, 수고했다!” 그러고는 개를 쓰다듬고 목을 끌어안아 주었다. 개집도 살펴보고, 농사짓는 곳도 살펴보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참 좋았다. 대답해 보아라. 거물들이 이런 더럽고 누추하며 어수선한 곳에 가겠느냐? 가지 않는다. 특히 개집이나 돼지우리같이 악취가 나는 곳에 가는 것은 보통 사람도 꺼린다. 나 역시 구린내나 악취를 싫어하지만 강아지가 풍기는 냄새는 참을 만하다. 때때로 강아지가 나한테 몸을 문대고 얼굴에 뽀뽀하거나 얼굴을 핥으면 안아준다. 동물은 단순해서 주인을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주인과 마음껏 놀고 교감한다. 동물의 삶은 이렇게 단순하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개나 작은 동물을 좋아하고 애호한다고 늘 이야기하면서 막상 강아지를 안아보라고 하면 꺼린다. 그가 “개는 더럽고 냄새나요.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라고 말하길래 나는 “넌 문제가 많구나. 작은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느냐? 이러는 건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실로 거짓된 사람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를 보통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가 존귀하고 신분 높은 거물인 줄 안다. 그러니 자기가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작은 동물과 닿고 싶겠느냐? 손으로 한번 쓰다듬기만 해도 재빨리 손을 씻고 소독하는 것도 모자라 옷을 다 갈아입고 집에 가면 샤워부터 한다. 이 정도로 깔끔을 떤다. 대답해 보아라. 이상한 사람이 아니냐? 네가 작은 동물을 정말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척하지 마라. 네 가식을 본 사람들은 네가 너무나도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음을 알 것이고, 보기 역겨워할 것이다. 그리고 너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이 마음속에 생길 것이다. 동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절대 좋아하는 척하거나 자기를 미화하지 마라. 네가 너를 미화할수록 사람들에게는 추하고 저급하게 보일 것이다. 솔직하면 얼마나 좋으냐. 네가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네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성육신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며 평범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측면은 많은 사람이 접하며 봐서 사실임을 알고 있다. 이는 너희가 그 무엇보다도 이해하고 알아야 하는 사실이다. 이렇게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다. 만약 그가 패괴된 인간처럼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면, 즉 큰소리치고 허풍 떨며 자기가 남다르고 범상치 않다고 뽐낼 뿐 아니라 독불장군처럼 군다면, 이런 사람과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성육신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입니다.)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게 사람에게 더 신뢰를 줄 수 있다는 게 확실하냐? (확실합니다.) 좋다. 이 측면은 더 구체적으로 교제할 필요는 없겠다. 그럼 저번 주제를 이어서 교제해 보자.
지난번에는 성육신에 대한 관념과 상상 내려놓기의 또 다른 주제인 ‘성육신 하나님을 패괴된 인간과 견주지 말 것’에 관해 교제했다. 맞느냐? (맞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인성 측면에서 보이는 처신과 일 처리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열거해 주었다. 그리고 기만하지 않고 다투거나 싸우지 않으며, 농간을 부리거나 공격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으며, 꾀지 않는 등 성품 본질에 관한 모습들도 열거해 주었다. 그중 기만하지 않고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지난번에 일부 교제했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교제할 차례냐? (농간을 부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농간을 부리지 않는 것은 기만하지 않고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처신하고 일 처리할 때의 원칙이다. 물론 이 원칙도 그의 인성 본질 및 성품과 관련된다. 농간을 부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 측면의 구체적인 성품 본질 혹은 처신의 한 측면의 모습이기도 하다.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느냐? 다 이해했느냐? (그렇습니다.)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하자면 음모나 술수, 계략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역에서든 아니면 생활에서든 나는 너희와 진실하게 접촉하고 교류한다. 술수나 계략을 쓰지 않고 음모도 꾸미지 않으며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속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하고 일의 경과도 너희에게 숨김없이 말한다. 너희에게 농간을 부리거나 너희를 기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너희가 기꺼이 헌신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도록 감언이설로 너희를 속여 신뢰를 얻지 않는다. 내가 그런 적이 있었느냐? (없습니다.) 너희에게 대답해 보라고 하면 분명히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서 이를 설명할 수 있겠느냐? 너희가 모두 예를 하나씩 들 수 있다면 이 사실의 근거가 명확해지고, 농간을 부리지 않는 모습을 너희가 진정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회에서 기술을 배워서 한 분야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하나님 집에 그가 배운 분야와 관련된 사역 또는 일이 있어서 내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이 분야의 업무를 잘 안다고 하고 마침 하나님 집에도 그 분야의 사역이 있으니 네가 할 줄 아는 업무를 토대로 너희 업계의 규칙이나 원칙에 따라 그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원한다면 그 사역을 네게 맡기겠다.” 여기에 농간을 부리고 사람을 이용하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음모가 깔린 말이 한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확실히 없느냐? (확실히 없습니다.) 네가 그 분야의 업무를 잘 안다며 자기를 추천했고 내가 너의 상황을 파악했으니, 네게 그 사역을 맡기는 것이다. 네가 하고 싶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사역, 이 본분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해라. 그리고 네가 자원한 것이니 제대로 해라. 만약 원치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내게 그 본분을 이행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된다. 내가 강요하겠느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대하는 나의 원칙에 따라 네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절대 소에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는 식으로 반드시 내 뜻대로 하라고, 하기 싫어도 하라고 하지 않는다. 내 신분이 이러하기에 내 말엔 그 정도의 무게가 있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은 황제의 말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천금과 같아서 바뀌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관용을 베풀고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준다. 나는 하나님 집 사역의 필요에 따라 사역을 안배한다. 만약 스스로가 원하고 해당 사역을 더 잘 이행할 수 있는 업계 관계자나 업계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더 좋을 것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면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는 게 나의 원칙이다. 만약 어떤 사역에 너를 안배했는데 네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아요. 저는 남한테 이용당하고 하나님 집의 안배를 받는 게 싫거든요. 제가 알아서 선택할래요.”라고 한다면 그래, 하나님 집은 너를 쓰지 않겠다. 본분은 기꺼이 원해서 이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본분을 이행하고자 해야 교회가 사역을 안배할 수 있다. 네가 본분 이행을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 집도 네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나는 더더욱 내 신분이나 지위로 사람에게 교회 사역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 본분을 이행하고 사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진리를 깨달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하나님 집은 본분을 이행하라고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사람에게 무조건 내 뜻대로 하라고 하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일을 네게 시키고 싶을 때 나는 직설적으로 말할 것이다. 절대 술수를 쓰거나 돌려 말하거나 모호한 말로 내 의도를 유추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약 네게 분량이 있고 하나님 집을 위해 사역하겠다는 부담이 있다면 나는 곧바로 네게 물을 것이다. “너는 이 사역을 담당하길 원하느냐?” 혹은 좀 더 직설적으로 “네가 이 사역을 맡거라.”라고 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간명하게 말한다. 네가 사람이기만 하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이 과연 무슨 뜻인지,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고민하고 유추하느라 뇌세포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내 말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게 만들지 않고 직설적으로 알려줄 것이다. 내 말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이다. 또한 내가 왜 그 사역을 네게 시키겠느냐?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일원이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 집에 네 협력이 필요한 사역이 있다면 너는 그것을 감당해야 할 의무가 있다. 네게 어떤 사역이나 일을 부탁하든 그건 내가 너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여기기에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것을 책임, 의무, 본분으로 여기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바람직하다. 네게 사역을 부탁하든, 일을 맡기든 이는 모두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진리를 구하고 얻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거래 관계가 없다. 너를 어르고 속이는 것도 아니다. 네게 한 말, 네게 맡긴 일은 모두 긍정적이고 공개된 것으로, 비밀스러운 게 아니다. 그 안에는 금전이나 물질, 이해관계는 물론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도 없다. 하나님 집이 네 특기나 기술, 업무상의 지식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하나님 집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본분 이행은 모두 기꺼이 하고자 하는 사람의 바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 집은 결코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그 본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조물로서 해야 할 일이다. 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여 구원받는 길이기도 하다. 본분 이행을 통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진리를 얻어서 하나님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고, 기억되며,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네가 대가를 치르고 나서 받아야 할 수확이다. 그러니 너는 절대 우려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 사역을 본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네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면 사실대로 말할 것이다. 나는 간명하게 말하는 게 좋다. 너를 세 살 아이 달래듯 어를 필요가 없고, 돌려 말하거나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또 네게 듣기 좋은 말을 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네가 노래할 줄 알거나 춤출 줄 알고 그런 측면의 선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네게 그 본분이 안배됐을 때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만약 “제 선천적 조건으로는 이 측면의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할 것 같아요.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라고 한다면, 괜찮다. 그건 네 자유이니 강요하지 않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너희에게 무슨 일을 요구하든 거기에는 농간이 없다. 내가 리더 일꾼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교회 생활이 어떠냐? 새 신자가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해결되었느냐? 하나님 집의 체험 간증이나 영화를 보고 난 그들의 소감이 어떻더냐?”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하는 리더 일꾼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 실상을 알아보려 나를 떠보시는 거 아닐까? 내가 실질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시려는 거 아냐? 신중하게 대답해야겠어. 방심은 금물이야! 제대로 한 사역은 말해도 되겠지만, 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안 한 사역은 절대 말해선 안 돼. 말하는 순간 문제가 탄로 날 테니까!’ 그래서 그는 사역 상황을 보고할 때 늘 말을 아끼려 한다. 문제가 탄로 날까 봐 몹시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생각이 복잡하다. 내 질문을 받으면 사실 대답이 입가에 맴돌지만 그대로 말하지 않고 꼭 속으로 가공할 생각을 한다. ‘왜 이런 걸 물어보시지? 어떻게 적절히 대답해야 하나님께 실상을 숨기는 동시에 흡족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사실 내가 한 말 중엔 머리를 굴려서 가공된 말은 한마디도 없다. 내가 어떤 상태에서 물어보겠느냐? 한 사람을 만나 그가 어떤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지 알고 나면 그 즉시 마음속에서 그가 어떤 구체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지, 그가 사역하면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기 쉽고, 어떤 난관에 봉착할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생각이 들면 나는 바로 물어본다. “요즘 네가 맡고 있는 몇 군데 교회의 교회 생활은 어떠냐? 교회 리더가 일을 적절하게 돌보고 있느냐? 형제자매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느냐? 많은 사람이 영 생활을 하고 있느냐? 여가 시간엔 찬양과 율동을 배우느냐? 복음 전파 사역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 내 모든 질문은 단도직입적이다. 그 어떤 시험이나 다른 속셈이 없다. 그저 사역과 사람의 생명 진입만 고려할 뿐이다. 어떻게 대답하든 너는 시험당하지 않을 것이며 내게 트집이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이 탄로 나거나 트집 잡힐 일은 없다. 나는 그저 사역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아볼 뿐, 어떤 사람의 실태를 파악하려 일부러 물어보거나 특정인을 콕 집어 처리 또는 교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급 투쟁이나 당파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실질적인 사역만 할 뿐이다. 가끔 나는 형제자매나 리더 일꾼을 만나면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속 이야기를 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며 때로는 교회 사역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말은 모두 일상적인 말이고 솔직한 말이다. 예를 들면 내가 너희에게 “요즘 교회 생활은 어떠냐? 예배가 매번 형제자매에게 유익하냐? 교회 생활을 하면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요즘 교회 생활이 좋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큰 수확이 없고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는다. “문제가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많은 사람이 대답하지 못한다. 너희가 보기에 내 말에 함정이 있느냐? 음모가 있느냐? 전혀 없다. 사역에 관해 알아보고 상황을 파악해서 너희에게 좀 더 수월하게 진리를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대답하든 시험당하지 않을 것이다. 일부 순수한 사람들은 사실대로 말할 수 있어서 이런다. “형제자매가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됐고 아직 경험이 없어서 예배 시간에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읽는 게 길어지면 깨닫지 못하는 데다가 졸면서 듣지도 않더라고요. 저희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내가 말한다. “그건 어렵지 않다. 다 같이 찬양을 먼저 한 다음 율동을 하고 나서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인식이 있는 사람은 인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체험이 있는 사람은 체험을 이야기해라. 인식이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실질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해서 체험이 있는 형제자매에게 도움을 받아 해결해라. 그러면 예배에 수확이 생기지 않겠느냐? 분량이 적은 사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보아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느냐?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떠들다가 질문할 때가 있는데 일부 마음이 복잡한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한다. ‘굉장히 노골적으로 물어보시네. 어떤 의도로 물어보시는지 모르겠어. 신중하게 대답해야겠군!’ 잘 들어라. 너는 잘못 생각했다. 내가 누구와 한담하든, 혹은 어떤 질문을 하든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것으로, 너희에게 도움을 주고 너희를 지도하며 너희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다. 첫째, 너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어 망신을 주는 게 아니다. 둘째, 네가 사실대로 말하는지 정직한 사람인지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네 실상을 알아보려 떠보는 것이 아니다. 넷째, 네가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지, 실질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실 내가 어떤 내용의 한담을 하든 그것은 네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사역을 잘하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고 지도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 단순한 물음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는 그 안에 어떤 의도가 섞여 있을까 봐 걱정한다. 심지어 자기한테 농간을 부리는 거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분명 네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우려는 것인데 너는 농간을 부린다고 생각하다니, 이는 내게 누명을 씌우는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떤 문제냐?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이다!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이시잖아요! 저는 사실만을 고하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대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따르고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일상적이고 단순한 질문을 던져도 사람은 과민하게 해석하기 일쑤다. 생각과 추측을 통해, 또 연구를 통해 몇 번이고 꼬아서 자기가 최종적인 답을 찾은 것 같겠지만 사실 내가 말한 본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분명 간단한 질문인데 그는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신경과민이 아니겠느냐? 내가 어떤 질문을 하든 그는 들으면 마음이 심란해진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지?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시고 내 흠을 못 알아보실까? 어떤 것부터 말하고 어떤 걸 나중에 말해야 하지?’ 불과 몇 초 만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대답이 나온다. 머리 돌아가는 게 컴퓨터보다 빠르다. 왜 이렇게 빠르겠느냐? 사실 이 과정이 너무 익숙해서 누워서 떡 먹기인 것이다. 이는 그가 남들과 교류하고 일을 처리할 때 흔히 쓰는 수법이자 방식이다. 누구를 상대로든 농간을 부린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단순하게 물어봐도 그는 복잡하게 생각해서 내가 어떤 속셈이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그러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만약 사실대로 답하면 내 실상을 까발리는 게 아니겠어? 내가 나를 팔아먹는 꼴이야. 내 실상을 손에 쥐여줄 수는 없지.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고 흡족해하면서, 나한테 좋은 인상을 가지고 계속해서 나를 쓰게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보아라! 사람의 마음은 너무 복잡하다. 그에게 어떻게 말하든 그는 의심하고 연구하려 든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생각이 전혀 단순하지 않고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를 접한 시간이 긴 사람이면 모두 알아차릴 것이다. 사람은 농간을 부리는 데 도가 텄지만,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소통할 때 농간을 부린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네 개인적인 내적 상태를 알아보든 네 사역 실태를 알아보든, 이는 모두 너를 도와주고 사역 중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다. 설령 네가 잘못해서 책망 훈계를 받거나 교체되더라도 네게 농간을 부리거나 너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문제만 해결되면 그만이다. 하나님 집이 네게 농간을 부리거나 너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트집을 잡고 늘어지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며, 모든 사람이 너를 따돌리고 거부하게 하거나, 너 스스로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사임하게 하려 어떻게든 너를 매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네가 리더 일꾼을 맡기에 부적합하더라도 기껏해야 “너는 자질이 너무 부족하고 영적 이해력이 없으니 리더 일꾼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다. 리더 일꾼으로 뽑히더라도 실질적인 사역을 못 할 것이다.”라고 하는 게 고작이다. 하나님 집은 절대 이를 이유로 너를 괴롭히거나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
하나님 집에는 어떤 사람을 발탁해서 쓰고, 어떤 사람을 쓰지 않는지, 어떤 사람을 양성하고, 어떤 사람을 양성하지 않는지에 관한 원칙이 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집 사역의 필요에 근거한다. 어떤 사람을 발탁하여 쓰든 모두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여 사역을 감당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어떤 문제를 해결하든 이는 모두 사람이 진리를 더 많이 깨닫고, 자신이 직면한 여러 유형의 사람과 일에서 공과를 배우고 분별할 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각 측면의 진리 실제에 쉽게 진입할 것이다. 너를 이용해 봉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적격자를 찾지 못한 공백을 너로 메웠다가 적격자가 생기면 너를 치워버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사실 이는 네게 훈련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굳게 설 것이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 네가 눈에 거슬린다고 트집을 잡아 도태시킬 기회를 엿보는 게 절대 아니다. 하나님 집이 너를 양성하고 발탁하겠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너를 양성하겠다는 말이고 네가 어떻게 진리에 이르는지 보겠다는 말이다. 네가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 집도 너를 포기하고 양성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양성되다가 자질이 떨어져서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못해 교체되는 사람이 있고, 양성되는 동안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제멋대로 방해하고 교란하여 교체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면서 오로지 명예와 이익, 지위만을 위해 사역하다가 교체되고 도태되기도 한다. 이는 모두 사람을 쓰는 하나님 집의 원칙에 따라 처리된 경우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설사 잘못을 저지르거나 과오를 범하더라도 하나님 집이 양성할 것이다. 반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책망 훈계를 받아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바로 교체되고 도태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토사구팽 아닌가요? 사람을 이용한 게 아니냐고요.” 대답해 보아라. 한 사람이 교체되거나 도태되고 더 이상 하나님 집에서 양성되지 않는 이유가 그의 이용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겠느냐? 그런 적이 있었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집은 어떤 경우에 사람을 교체하고 도태시키느냐? (사람이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방해하고 교란하며 악행을 저질러야 하나님 집이 그를 교체하고 도태시킵니다.) 한 사람이 교체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자질이 떨어져서 구체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어느 정도 자질은 갖췄지만 구체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도 않으며 할 수 있는 사역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마음 쓰이거나 힘든 게 싫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거나 남한테 미움을 사기도 싫은 것이다. 이런 사람은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않으니 도태시켜야 한다. 그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교회 사역을 그르칠뿐더러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에도 지장을 줄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실질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해당 사역을 맡을 수 있게 주제 파악을 잘하여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실질적인 사역은 하지 않으면서 지위의 복만 누리는 것도 모자라 방해하고 교란하기까지 한다. 그는 오로지 상부에 자신의 문제가 탄로나 교체될 걱정만 해서 사역에 관해 보고할 때 문제를 제기해 진리를 구하는 척하면서 무척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상부에 좋은 인상을 남겨서 자기가 진리를 구하는 사람, 실질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상부는 말주변이 좋은지,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지, 머리가 똑똑한지를 근거로 사람을 발탁하여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지를 근거로 사람을 발탁하고 양성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역을 하거나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기는커녕 교란하고 방해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려 한다. 그리고 하나님 집의 사역 지침에 금지된 일과 해야 할 일이 명시되어 있는데도 그들은 하나도 실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일삼는다. 이런 사람이 적지 않은데 전부 교체되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 집이 사람을 발탁하는 목적은 사람을 양성하고 그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이 교회 사역을 제대로 하고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네가 어리석고 식견이 없어서 혹은 자질이 떨어져서 이행할 수 없는 사역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진리 원칙에 이르고, 책임감 있게 그 사역을 잘해보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교회 사역을 지킬 수만 있다면 예전에 어리석은 짓을 했더라도 하나님 집은 너를 양성할 것이다. 자질은 조금 떨어져도 간단한 사역은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비록 그는 진리를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면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지만 교회 사역을 지킬 수는 있다. 예배 때마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그는 받아들이고 청종할 수 있고 제대로 하지 못한 사역이 있으면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자질은 떨어지지만 그의 마음은 진리에 이를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사역하면 성장하고 성과도 점점 좋아진다. 내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이 쉽게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 관점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야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고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자질이나 본분 이행의 성과는 그저 그렇지만 최근 몇 년간 하나님 집의 양육과 공급을 통해 진리에 힘쓰기 시작하더니 정말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고 실질적인 체험도 어느 정도 생긴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을 꿰뚫어 보고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교회 사역에서 점점 나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잘된 일이다. 이런 사람은 양성할 가치가 있다. 네가 그 사역을 완벽하게 감당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상부는 네가 사역을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것이다. 대답해 보아라. 사람에게 본분을 안배하는 것이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네가 할 수 있는 사역이 얼마나 되든, 네 자질이 어떻든, 너를 발탁하여 쓰는 것은 너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회 삼아 네가 사역하도록 훈련하고,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고생하며, 중임을 맡는 것을 통해 너를 온전케 하려는 것이다. 이는 너 개인을 온전케 하는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집 사역을 온전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는 선행도 예비하면서, 개인의 생명 진입에도 수확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드러나서 도태된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를 이용해서 하나님 집에 봉사하게 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아십니까!” 이런 말까지 내뱉을 수 있다니, 이런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겠느냐? 이런 사람이 진리를 깨닫겠느냐? 사람에게 본분을 안배하는 것이 어찌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란 말이냐? 네가 만약 정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창조주의 뜻을 깨달아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런 양심과 이성조차 없으면서 네게 피조물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겠느냐? 네가 정말 양심과 이성을 지녔다면 본분을 올바로 대해야 하고, 네가 이런 자질을 갖췄다면 진리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고 네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협력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집이 네게 사역 하나를 안배하거나 임무를 하나 맡길 것이다. 이는 농간을 부리거나 너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발탁하고 양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를 진리 실제에 진입하도록 이끌기 위해 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나이도 많고 의욕이 부족한 데다가 체력도 형편없습니다. 이 임무를 맡고 싶지 않아요. 사양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럼 나는 괜찮다고 말해 준다. 하지만 사양하기 전에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라 네 개인적인 생각에 변화가 생겨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라면, 고생하고 힘들까 봐 걱정되고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할 때의 충격이 클까 봐 걱정되며, 감투 쓰면 고생이라는 관점을 늘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신중해야 한다. 그 부탁과 특수한 본분을 사양하지 말고 잘 고려해 봐야 한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지 않으냐? 네가 “말릴 필요 없어요. 오랫동안 숙고해서 진작에 마음먹은 일이니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이 임무로 고생하고 싶지 않거든요. 남들은 다 편하게 지내는데 무엇 때문에 저만 힘들어야 하죠? 저는 고생할 팔자라는 건가요? 이렇게 고생하는 건 내키지 않습니다!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게 달갑지 않아요! 교회는 제게 농간을 부리지 마세요. 전 교회의 노예가 아닙니다. 제가 교회에 팔려 오기라도 했습니까?”라며 고집을 부릴 거라면, 이런 듣기 거북한 말은 계속할 필요 없다. 계속한다면 너는 너무 많은 죄를 짓게 되어 네가 했던 말과 선택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다. 첫째, 네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복을 받기 위해서였지, 하나님 집에 팔려 온 것이 아니다. 둘째, 네가 하나님 집에 팔려 오기를 바란다면 하나님 집도 네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너를 사서 쓸모가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니 하나님 집이 너를 이용해서 봉사하게 하려고 농간을 부린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지가 사람을 검증하는 하나님 집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은 이런 몇 가지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양성한다. 네가 만약 하나님 집을 그토록 나쁘게 생각한다면 너는 양심과 이성이 없는 무가치한 사람이다. 하나님 집은 네 본분 이행이 필요 없을뿐더러 너 같은 불신파는 당장 도태시킬 것이다. 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니 하나님 집에서 대충 뭉개려 들지 말고 당장 하나님 집을 떠나야 한다. 너는 하나님 집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집에 이런 사람은 필요 없다. 당장 떠나거라.
편하게 이야기하고 떠들든 아니면 정식으로 교제하고 설교하든, 내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 내가 이야기하는 일과 교제하는 진리 하나하나의 목적은 너희가 자신의 패괴된 내적 상태, 자신의 결점과 결핍, 부족함, 고충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각종 배경과 환경에서 나타나는 자신의 패괴 표출을 인식하는 것이다. 너희가 패괴 성품을 인식하면 자기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자기 주제를 알게 되어 좀 더 이성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고 하나님 말씀에서 그와 관련된 실행 원칙과 실행 길을 찾아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할 것이다. 일상에서 표출하는 패괴 성품을 해결하든 인성의 부족함을 해결하든, 이런 패괴 성품이나 하나님이 혐오하는 사탄에게 속한 각종 사상 관점을 서서히 벗어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여 일을 바라보는 관점, 생명 성품에 진실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맞다. 일상에서 너희와 대화하는 것이든 정식으로 교제하고 설교하는 것이든 내가 하는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는 너희의 실상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내가 너희의 필요를 보았기에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내가 열거한 사실은 비록 약간의 가공을 거치긴 했지만 이런 실제 사례들은 모두 너희의 패괴 표출을 바탕으로 한 사실이자 너희의 행동거지를 바탕으로 선택한 대표적인 실제 사례이다. 이 사실과 사례들을 통해 인간의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을 폭로하여 사람이 스스로 반성하고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측면의 주제를 교제하든 거기엔 첫째, 함정이 없고, 둘째, 음모가 없으며, 셋째, 시험이 없다. 전부 너희가 좀 더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잘 깨달아 진리 원칙대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모두 사실이다. 따라서 세월이 얼마나 흐른 이후든, 일상에서 일이 임했을 때 너희와 소통하고 대화한 내용, 혹은 공식적인 사역에서 교류하고 질문한 내용을 회상하면 내 말 속에서 음모나 함정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너희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겠느냐? 협잡하려는 의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확실하냐? (확실합니다.) 가령 농장에서 사육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에게 암탉이 며칠에 한 번씩 알을 낳을 수 있는지 물으면 그는 이런 고민을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내가 잘 사육하고 있는지 살펴보시는 건가?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만약 하루에 하나씩 낳는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한 게 되잖아. 그렇다고 이삼일에 하나씩 낳는다고 하면 내가 닭을 잘 먹이지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으실까? 영양가 있는 사료를 주지 않는다고 말이야.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그는 계속 고민하느라 대답하지 못한다. 사실 내 질문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닭의 사육 실태를 파악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물으면 사람은 공연한 걱정을 하면서 내가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끊임없이 추측한다. 대답해 보아라. 이런 사람은 난감하지 않으냐? 이런 사람을 만나서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하겠느냐? 소통할 방법이 없다. 나에겐 습관이 하나 있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러다 몇몇 문제를 발견할 때도 있다. 그것이 만약 환경 위생의 문제라면 정리하거나 손보고, 인원에 관한 문제라면 조정한다. 그리고 기술 업무상의 문제라면 물어보고 배운다. 문제가 보이면 바로잡는 것이다. 많은 문제가 일상에서 대화하다가 무심코 발견되고 해결된다. 실질적인 문제들이 손쉽게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접촉하고 교류할 때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많은 문제가 사람과 접하는 중에 발견되고 손쉽게 해결된다. 이래서 사람과 접하고 대화하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한 것이다. 단지 상황이 파악되고 문제가 발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것이 수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나와 대화할 때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서 선뜻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내 말 속에 다른 의도가 깔려 있지는 않은지, 누구에게 농간을 부리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그래서 내가 물으면 긴장해서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날이 덥지도 않은데 왜 땀을 흘리느냐?”고 물으면 그는 “하나님은 안 더우실지 모르지만 저는 더워요.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놀라서 간 떨어질 뻔했거든요. 지금 손발이 축축하고 심장이 쿵쾅거릴 지경이에요.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해준다. “긴장할 필요 없다. 나는 그냥 편하게 얘기하고 한담하는 것뿐이다. 정말 문제가 있으면 같이 해결해 보자. 문제가 발견되면 내가 삼족이라도 멸하는 것처럼 나를 무섭게 생각하지 마라.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 누구를 처단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너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겠느냐? 첫째, 나는 반드시 원칙적이고 절대적으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 감정이나 성질에 따라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네가 눈에 거슬린다고 네게서 흠이나 꼬투리를 잡고, 트집을 잡아서 너를 쫓아내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앉혀 대신 사역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사람이든 실제 상황, 실제 문제에 근거하여 처리한다. 여기엔 원칙이 있다. 사람이 잘못하고 어리석으며 연약하고 소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네가 까불대고 소란을 피우면서 교회 사역을 고의로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너는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고 늘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기만 한다면 네 본분 이행은 교회에 필요 없다. 하나님 집은 적합한 사람으로 너를 대체할 것이다. 이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나는 원칙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처리하며, 사람을 처리한다. 내가 네게서 무슨 문제라도 발견하면 너를 처리해 버릴 거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를 살펴서 그 문제의 성질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만약 네 문제의 성질이 심각하지 않고, 고의가 아닌 일시적인 소홀함이나 어리석음으로 초래된 문제라면 진리를 교제하여 해결할 것이다. 거기서 교훈을 얻어 앞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때로는 사람이 식견이 없어서 그 분야의 업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당장 업무를 배워라. 그런데 만약 인위적이고 고의적인 거라면, 네가 그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하고 고의로 하나님 집의 재물에 손해를 끼쳤다면 이는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교체할 사람은 교체하고 쫓아낼 사람은 쫓아내야 한다. 네가 두려워해도 소용없다. 너희가 만약 이런 믿음을 지닌다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훨씬 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나 사역과 업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음을 편하게 가질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농간을 부리지 않으며 네게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음 놓고 안심해라. 만약 네가 이런 믿음마저 지니지 않아서 하나님이 선하고 공의롭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따르며,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너의 믿음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떻게 그를 솔직하게 대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를 항상 경계하고 추측하며 의심하고 연구한다면 그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네가 이 사람을 진실하게 신뢰하지 않고 진실하게 믿지 않는데 내가 한 말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겠느냐? 어떤 말을 네가 진실하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한번은 어느 교회를 둘러보러 간 적이 있다. 들어가서 인사부터 했더니 몇 사람이 맞이해주면서 얼른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어떤 일에 관해 논의하던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보니 방금까지 있던 너덧 명 중 어찌 된 일인지 두 명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방에 가서 매무새를 가다듬고 잠시 후 다시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있는 내내 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알게 되었다. 날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나는 불청객이었다. 내가 가서 그들이 자유롭지 못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여기에 오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함정에 빠질까 봐, 농락당할까 봐, 어떤 음모라도 있을까 봐 걱정했다. 그러니 내게 얼굴을 비치는 것을 거부하고, 나와 교류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교묘하게 내 생각을 집어넣지도 않았고,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아마 내가 문을 열고 나가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을 것이다. “드디어 가셨네요. 어휴, 깜짝 놀랐네!” 내게 사람들을 그렇게 기절시킬 정도로 대단한 ‘매력’이 있었다니? 대답해 보아라.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믿는 사람은 나도 처음 본다. 이런 부류는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빛 가운데에서 살고 광명정대하게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답해 보아라. 나를 만나면 너희는 난처하고 긴장되어서 나와 교류하고 싶지 않으냐? 아니면 나를 만나 진리를 얻길 바라고 조금 긴장되더라도 괜찮으냐? 어떤 심정이냐?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유익하다면 괜찮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만나 두세 시간 교류하면, 내가 교제해 준 많은 내용이 모두 중요하다고 느낀다. 자기가 들어본 적 없는 내용이니, 오늘 이 이야기를 들은 게 너무나도 값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척 내 교제를 듣고 싶어 한다. 가끔 여담이라도 하면 약간 실망하고, 내 말에서 무언가를 얻어야 흡족해한다. 나는 이런 사람에게는 현실의 일과 결합해서 진리를 교제해 주려고 한다. 그들이 얻는 것이 있도록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나만 보면 자기한테 상황을 물어볼까 봐 걱정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난처해한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지 못하고 너무 복잡하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구하고 싶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든 남들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부 이야기할 줄 안다. 이것이 바람직하다. 마음을 활짝 열고 속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 우리가 교류하고 대화하는 원칙이다. 나는 정상 인성으로 너희와 교류하고 상호작용한다. 내 신분과 지위로 인해 내가 아는 것이 너희보다 많으니 당연히 내가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너희가 듣고자 한다면 수확이 있을 것이고 듣기 싫다고 해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관해 너희에게 견해나 생각, 혹은 체득하거나 이해하고 인식한 바가 있다면 나누어도 된다. 이것을 상호 작용이라고 하고 정상 인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내 말이 중요하게 느껴진다면 열심히 들어야 한다. 그런데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말하지 않고 네 말을 들어보겠다. 만약 할 말이 없다면 내가 질문하고 일깨워주겠다. 예를 들면 “요즘 교회 생활이 어떠냐? 본분 이행에 별 어려움은 없느냐?”라고 말이다. 네게 어려움이 있다면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어려움이 해결되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이것을 상호작용이라고 한다.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게 양심과 이성이 있어 인성이 정상이라면 우리는 솔직함, 신뢰, 존중을 바탕으로 대화하면서 마음을 활짝 열고 속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양심과 이성을 지니지 않았고 진리를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면 실행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부터 연구하지 않기, 눈치 살피지 않기, 얽매이지 않기, 시험하는 말 하지 않기를 배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 못 해요.”라고 한다. 그렇다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말을 하지 말라는 것마저 네게 농간을 부리고 너를 얽매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네가 자리를 떠나면 된다. 나는 누구를 만나든 아무 요구도 하지 않는다. 결코 사람을 얽매지 않는다. 만약 늘 내 트집만 잡는 사람이 있어서 말을 해도 불만, 안 해도 불만이라면, 이런 사람은 거리를 두고 만나지 않는 수밖에 없다. 만약 나를 만나는 것을 늘 두려워하고 내가 농간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만나 진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 들어라. 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너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늘 사람을 나쁜 쪽으로만 보면서 누구든 너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네게 농간을 부린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내가 믿어지지도 않아서 나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인성적으로는 하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공통된 관심사나 취미가 없고 함께 추구하고 바라는 목표가 없다. 네 인성이 가는 길, 네 희로애락, 네 기호와 취미는 나와 다르다. 네가 좋아하는 것은 죄다 부정적인 것이고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전부 긍정적인 사물과 관련된 주제다. 네가 늘 나를 연구하려고만 하고, 내가 어떤 진리를 교제하든 그 속에 음모나 농간이 없는지, 네가 손해 보거나 속아 넘어가진 않을지에 대해서만 궁리한다면, 우리의 대화와 교류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껄끄러울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나도 어색하고, 너도 어색하고, 서로 어색할 것이다. 함께 지내기에 서로가 괴롭지 않겠느냐? 행복하겠느냐? 행복하지 않다. 만약 네가 내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또 듣고 싶어 한다면, 내가 다루는 주제가 네가 바라고 정말 좋아하며 추구하고 네 인성의 필요에 부응하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별말 없이 함께 앉아 있어도 마음속에 아무 반감이나 거부감도 들지 않고 함께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생활하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모두 실제적이고 사람에게 유익한데도 네가 듣기 싫어하고 속으로 반감이나 거부감을 품는다면, 그리고 내가 하는 긍정적인 사물에 관한 이야기나 진리를 교제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 특히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주제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내가 너를 세뇌하고 기만하는 거라고, 하나님 집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너를 이용해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많이 얻으려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네가 틀린 것이다. 너는 늘 비뚤어진 쪽으로만 생각하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시비를 전도시키려 하는 것도 모자라 긍정적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을 사회 풍조에 맞지 않는 부정적이고 사악한 일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 봤자 네가 그것을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통할 방법이 없다. 말이 안 통해 화목하게 지낼 수 없고,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고,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겠느냐? 확실하게 말해 너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다. 내가 아무리 정당한 주제, 정당한 실행의 길과 실행 원칙에 관해 이야기해도 너는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 사악한 시각과 입장, 관점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것이다. 내가 말한 올바른 실행의 길과 실행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내 말이 껄끄럽게 들릴 것이다. 왜 껄끄럽겠느냐? 그것들은 네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 너는 자유를 추구하고 떼돈을 버는 것, 먹고 노는 것을 추구한다. ‘세상을 사는 데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늘 술이 있으면 오늘 취해라’가 네 좌우명인 것이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사악한 풍조, 괴상망측한 옷차림, 연예인이나 유명인, 사람의 출중하고 위대한 모습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 집에 속한 사람도 아니다. 네 인성은 긍정적인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교류 과정에서 내가 어떤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없고 정상 인성다운 수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한낱 이론이나 주장, 방식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사례까지 들다니, 지금 자기 사상 관점을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심으려는 것 아니겠어? 사람들이 자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고 세뇌당하게 만드는 거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 온갖 사상 관점에 의해 마비되는 거야.’ 정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말이 진리가 아니고, 사람이 받아들이고 실행해야 할 참도가 아니며,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해도 된다. 그것은 네 자유다. 교회를 떠나도 좋다. 너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고 진리를 거부할 권리 또한 있다. 하지만 사실을 왜곡하거나 시비를 전도시키지는 마라. 진리는 언제까지나 진리다. 몇몇 사탄, 마귀가 부정하거나 정죄한다고 진리가 아닐 수는 없으며 더군다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아닐 수도 없다. 진리는 영원히 존재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든 진리는 영원히 진리이다. 내가 너희와 이야기하고 교류하며 상호 작용하는 것은 완전히 나에 대한 너희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신뢰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내가 하는 모든 말과 질문, 혹은 내가 이야기하는 모든 일들 속에 농간이나 음모는 물론 함정도 없다는 사실, 또 내가 너희를 시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나와의 교류를 통해 너희는 충분히 자유롭고 해방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너희가 나와 교류할 때 자유롭지 않고 해방감도 느끼지 못하며, 얽매이는 게 아니면 껄끄럽게 느껴지거나 늘 경계심이 생긴다면, 그것은 진실로 내 문제가 아니라 너희의 문제다. 너희의 어떤 측면의 문제겠느냐? 너희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너희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문제를 그에 맞게 해결해라. 너희가 발견할 수 있는 문제라면 모두 해결해라. 만약 발견된 문제가 많다면 적어 놨다가 하나씩 해결하고, 각각의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라. 그러한 일이 생겼을 때, 너는 성찰하고 반성하며 당시 네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문제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이 생기게 되는지 살펴보아라. 그러고 나서 차근차근 해결해라. 어느 날 네가 마음속의 이런 생각과 관점을 내려놓아 그 문제가 모두 해결된다면, 또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아 진리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리고 나를 신뢰해서 내가 모든 사람과 문제를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하고 절대 네게 농간을 부리지 않을 거라 믿는다면, 우리의 상호 작용이 편하고 즐거워질 테니 우리는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화목하게 지내면 행복이 피어날 것이다. 행복하고 즐겁고 평안하고 기쁘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됐는지 물어볼 때가 있다. 그러면 삼 년밖에 안 됐다고 하면서 겸연쩍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아 분량이 작다고 생각한다.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간 믿은 사람에 비해 한 수 아래이고 열등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이런 궁리를 한다. ‘이 질문으로 나한테 알려 주시는 건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고 분량이 작은데도 하나님 집에서 나를 발탁한 것은 파격적인 등용이니 하나님 집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건가?’ 질문 한마디에 그가 이토록 난처해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내 질문을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 말에 음모가 있다고, 내가 그에게 농간을 부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단순한 말을 그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한다. 믿은 지 삼 년 되었다고 대답하고는 난처해하면서 속으로 내 물음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 사실 나는 무심코 한 질문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너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네가 왜 난처하겠느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질문에 문제가 있었겠느냐? (아닙니다.) 나는 무심결에 물었다. 내가 만약 그동안 몇 명의 이성과 사귀었는지 네게 물었다면 이는 부적절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네 사생활을 묻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물은 것은 네 신앙과 관련된 일로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정당하지 않으냐? (정당합니다.) 그런데 너는 왜 선뜻 답하지 못하느냐? 정말이지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너무 복잡한 너의 문제다. 어째서 생각이 복잡하겠느냐? 성품이 사악하고 간사해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한테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되었냐고 물은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난 너를 만나자마자 네가 초신자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네가 하나님을 믿은 햇수를 토대로 네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진리를 깨달았는지, 뿌리는 내렸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고 본분은 이행할 수 있는지, 어떤 시련을 겪지는 않았는지를 파악하려 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네게 무엇을 교제해 주고 조언해 줄지 결정하려 했다. 그뿐이다. 이렇게나 단순한 내 생각을 너는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 싫어했던 것이다. 대답해 보아라.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네게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되었냐고 물은 질문에 너를 폄훼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악의가 있느냐? 너를 난처하게 하고 망신을 주려는 의도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몇 달을 믿었든, 혹은 일이 년을 믿었든, 내 의도는 너를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네가 열심히 추구하고 무척 열성적인 데다 그렇게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그렇게나 많은 것을 버리는 것을 보고 네가 평소에 얻지 못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이야기해 주려던 것이다.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는지 물어본 것은 네게 관심을 기울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너를 사랑하고 아껴서였다. 여기에 악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렇게 정당한 질문 한마디를 사람이 어떻게 곡해했느냐? ‘제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 제 분량이 작아서 아무 진리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 남들보다 뒤처지고 열등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으신가 보군요. 제게 망신을 주고 싶으신 겁니다.’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겠느냐? (못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화목하게 지내려면 먼저 너희가 나를 의심하거나 추측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문제가 나타나겠느냐?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즉 사람이 온갖 어려움에 봉착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온갖 어려움이 어디에서 생기겠느냐? 사람의 각종 잘못된 사상 관점에서 생긴다. 그렇다면 방금 말한 그 사람에게는 어떤 잘못된 사상 관점이 생겼느냐? 그는 하나님을 믿은 지 삼 년 된 사람은 교회에서 초신자에 속하고,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짧은 것은 자랑스럽지 못하며 열등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은 진리도 너무 적고 체험 간증도 교제할 줄 모르니 ‘이등 시민’에 속하고, 남들에게 무시당하므로 발설하면 난처하고 망신을 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남들은 일이십 년을 믿었는데 자기는 삼 년밖에 안 되었으니 남들이 자기한테 “그동안 뭐 하느라 하나님을 진작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있는 거 아녜요?”라고 할까 봐 걱정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경력이나 이력, 배경을 몹시 중시해서 이것들을 바탕으로 사람의 등급을 나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관점은 무엇이겠느냐? 그 역시 사람의 배경, 이력을 중시해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은 기간에 따라 삼 년, 오 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의 등급이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등급 때문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지 삼 년 된 것은 교회에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치 ‘이등 시민’처럼 말이다. 이는 그에게 부끄러운 꼬리표이자 치욕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은 햇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하필 그의 믿음이 삼 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만약 삼 뒤에 영이 하나 붙어서 하나님을 믿은 지 삼십 년이 되었다면 그는 자랑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 역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하나님께서 현현하셔서 역사하신 초창기부터 하나님을 따랐죠. 그간 여기저기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증거했어요. 하나님과 함께 길을 개척했죠! 하나님 집에서는 원로급 개국 공신이라고요!” 그는 대단히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진리를 선포했고 하나님 집의 체험 간증이 이렇게나 많은 것을 보고는 자기가 너무 늦게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은 지 일이 년이나 이삼 년밖에 안 되었다고 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속으로 이런 고민을 한다. ‘왜 그 시절에 믿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이 많은 진리를 왜 고찰해 보지 않았을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날 가로막은 사람이 누구지? 누가 나를 이렇게 괴롭게 만든 거야? 종교계 목사야. 정말이지 그들은 사람의 영혼을 집어삼키는 사탄, 마귀인 것 같아. 내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들을 찾아가서 끝장을 보겠어!’ 그러다 다시 이런 생각을 한다. ‘어휴, 우리 팔자가 사나운 거지 뭐. 박복하기도 하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아냐.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데 어째서 나 같은 길 잃은 양을 찾아서 얼른 하나님 집으로 데려오지 않으신 거지?’라는 생각도 든다. 책임을 다시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다. 사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 삼 년, 삼십 년의 믿음을 대하는 그의 사상 관점부터가 옳지 않다. 그는 믿음의 기간으로 사람의 등급을 나눠서 믿음의 햇수가 짧으면 남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상 관점이 생기고 난 다음에 내가 그에게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되었냐고 물어보면 그는 부끄러운 나머지 차마 입을 열지 못한다. ‘믿은 지 삼 년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기가 난감하고 창피하며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자신의 가치나 등급이 단번에 들통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니 이런 사상 관점이 내 질문에 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그가 ‘내가 하나님을 믿은 지 삼 년 된 건 사실이야. 믿음이 삼 년밖에 안 돼서 분량이 작고, 많은 진리에 있어 도리조차 분명하게 말하지 못해.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 믿음이 얼마나 되었는지 물으시면 사실대로 대답하겠어. 창피할 게 없거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게 열려 있고 훤히 드러나 있으니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대로 대답할 거야.’라는 사상 관점을 지녔다면 단순해진다. 신분이나 지위, 가치, 등급 따위가 결부되지 않고 그 어떤 잘못된 사상 관점의 제한, 영향, 통제, 지배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홀가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믿은 지 삼 년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이어서 이렇게 묻는다. “믿은 지 삼 년이 되었구나.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는 분명히 알고 있느냐?” 만약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분명히 알지 못한다고 하면 내가 빈둥거리기만 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다는 의미잖아? 삼 년 동안 믿으면서 이상 측면의 진리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먹고 마시지 않았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하면 이 주제는 하나님께서 교제해 주지 않으실 텐데 그럼 기회를 놓치는 거고. 내가 분명히 알지 못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교제해 주시거나 보충해 주시려나? 분명히 안다고 하면 보충해 주시지 않겠지만 나를 높이 평가해 주시지 않을까?’ 보아라. 또다시 허튼 생각을 하지 않느냐? 이 사람은 생각이 너무 복잡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골치 아프다. 그는 누구와 대화하든 속으로 늘 어떻게 대답해야 체면이 깎이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도 손해가 없을지 궁리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 대한 남들의 태도가 어떤지 관찰하면서 어떻게 해야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볼지, 어떻게 해야 자기 지위를 높일 수 있을지 늘 궁리한다. 항상 이런 궁리만 하니 마음을 활짝 열고 교제하며 속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상 측면의 진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느냐?”라고 물은 나의 질문에 다른 의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곧바로 이런 질문을 했겠느냐? 일반적으로 믿은 지 일이 년, 이삼 년이 되면 이상 측면의 진리도 교제해야 한다. 이는 밥 먹듯 언급되는 주제라 그가 만약 이상 측면의 진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교제할 필요 없이 다른 주제로 넘어갈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약 “이상 측면의 진리는 잘 모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심판 사역을 하셔서 사람을 구원하는 측면의 진리는 너무 심오해서 잘 모르겠어요. 교제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한다면 공통된 주제를 찾은 셈이니 교제해 볼 것이다. 다 함께 한 번 더 교제를 들으면 수확이 많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도 허세를 부린다. 허세는 부려서 뭐 하느냐? 계속 깨달은 척한다는 것은 다 아는 진리를 내가 더 교제해 봤자 군더더기라는 의미일 테니 나는 교제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너는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어떤 경우든 네가 사실대로 말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내 말을 주제넘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이야기하고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상 인성으로 교류하고 왕래하며 상호작용하면서 우리가 모두 좋아하는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수확이 생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의심이 많아서 내가 이상 측면의 진리를 잘 알고 있냐고 물으면 이런 생각을 한다. ‘무슨 의도로 물어보신 걸까? 내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뿌리를 내렸는지 살펴보고, 내 자질이 어떤지 시험해 보고 싶으신 건가? 그런 거라면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해.’ 그래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삼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늘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 집의 영화도 많이 봤습니다. 또 설교와 교제도 자주 듣고 예배 때는 언제나 제 체험적 인식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이상 진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그의 자질을 훌륭하게 생각하도록 나한테 좋은 인상을 남겨서 높은 평가를 받으려는 것이다. 대답해 보아라. 내가 그의 몇 마디 말만 듣고 그를 높이 평가하겠느냐? (그러지 않으십니다.) 내가 한 사람을 그렇게 쉽게 고평가하더냐?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는 이 일을 정확하게 보지 못했다. 만약 네가 이상 진리를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한다면 내가 너를 테스트해 볼 것이다. 네가 항상 읽는 이상 측면의 진리를 테스트해 볼 것이다. 하나님이 왜 형벌 심판 사역을 하려 하느냐? 형벌 심판으로 거두는 주된 결실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삼 년 동안 형벌 심판 사역을 조금이라도 체험해 보았느냐? 한 번이라도 형벌 심판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느냐? 형벌 심판을 체험했을 때 진리 원칙을 찾아내었느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구체적인 체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보통 사람은 도리만 조금 이야기할 뿐 실제 체험적 인식은 이야기하지 못한다. 사람은 결여된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 이야기할 주제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측면의 주제든지 네가 아는 만큼 교제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라. 비뚤게 생각하지 말고 네게 한 질문에 따라 답해라. 자기가 그 자리에서 생각한 그대로 말하고, 실상을 사실대로 이야기해라. 돌려 말하거나 가공하지 말고, 자기를 미화하고 포장하기 위해 허상을 지어내거나 거짓말로 기만하지도 마라. 전부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이다. 그러니 내가 네게 어떤 질문을 하든, 네게 어떤 측면의 주제에 관해 교제하든 네가 아는 만큼 말해라. 만약 네가 어떤 측면의 진리를 모르거나 이해한 내용이 도리라는 것이 밝혀지면, 혹은 치우치게 이해하거나 잘못된 사상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게 밝혀지면, 그 즉시 그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 순정하게 이해하고 정확한 실행의 길이 생기도록 내가 너를 바로잡고 지도하며 도와주겠다. 이렇게 교제하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 가지 주제에 관한 교제 원칙은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토대로 하고,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함께 교제하고 탐구하거나 서로 나누는 것을 토대로 한다. 이로써 사람은 교제한 긍정적인 주제를 좀 더 분명히 알고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하여 실행의 길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의심이나 농간, 기만을 토대로 하면 안 된다.
너희는 성육신 하나님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에 관한 주제를 교제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느냐? (좋습니다.) 어떤 점이 좋으냐? (성육신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상상을 없앨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실상을 저희에게 다 보여 주셔서 어떤 분인지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다 말씀하시다니 너무 순진하시네요!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지니고 계시는 건 맞지만, 그걸 있는 그대로 말씀해 버리시면 어떡하나요? 사람들한테 신비롭고 지극히 높고 크시며 헤아릴 수 없는 분으로 여겨져야죠. 사람을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더라도 계산적으로 대할 줄 안다고 말씀하셔야 해요. 사람을 쥐락펴락하고 다룰 수 있는 기술과 갖가지 술책을 가지고 있다고, 온갖 유형의 사람을 이용해 자기한테 봉사하게 할 수 있다고 해야 사람들이 숭상할 겁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이렇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시니 하나도 신비롭게 느껴지지 않잖아요?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는다고요. 세상의 큰 인물들을 좀 보세요. 군정계 거물이나 역대 왕들처럼 큰 인물, 걸출한 사람 중에 누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던가요? 누가 자기 스스로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필부라고 하던가요?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출중한 사람,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바라 마지않아요. 설령 지금은 범인이 되었다 해도 여전히 보통 사람은 속을 짐작하지 못하게 신비롭다는 거죠. 그래야 사람들을 통치하기 좋으니까요!” 그 왕들은 통치술에 능통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신이나 백성들이 짐작하지 못했다. 이런 말도 있지 않느냐? ‘군주의 뜻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군주의 명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방의 공무원들은 죄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말단 처장이나 과장, 매니저의 마음가짐도 이렇다. 그들은 자기 능력이 어떤지, 인성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또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일 처리에는 어떤 빈틈이 있는지 남들에게 간파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허점을 들키면 온 힘을 다해 위장하고 포장하며, 자기가 저지른 나쁜 짓이 발각되거나 폭로되면 희생양을 찾는다. 그들이 이러는 목적은 사실의 진상을 은폐해서 사람들이 계속 자기를 우러르고 숭배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어떤 일을 하든 사전에 모의하고 계획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국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키 맨(key man)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절대 자기가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필부라는 것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는다. 사실 그는 보통의 패괴된 인간에 불과하며, 평범한 사람에 비해 약은 꼼수를 많이 쓰고 음모와 간계에 능한 것뿐이다. 그러니 자기 인성이 얼마나 음험하고 악랄한지 어찌 남들에게 알릴 수 있겠느냐? 그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지 않겠느냐? 패괴된 인간은 모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서 다들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며, 속내가 음험하고 악랄하다. 하나님이 성육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마음속으로 인정하겠지만, 성육신 하나님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그들은 정말 성육신이라면 최소한 육신에서 하나님의 기운이 느껴져야 하고, 하나님 신분 본질의 여러 징조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육신께서는 중생을 굽어보는 시선과 자세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네요. 늘 단정하고 바르게 처신하고 착실하게 일을 처리하라고 하시잖아요. 이는 당신이 보통 사람이라는 실상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형성되어 있는 성육신 하나님의 지극히 높고 큰 이미지, 신비로운 이미지가 전부 훼손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단정 짓는다. 대답해 보아라. 훼손되는 것이 안 좋은 일이냐? (좋은 일입니다. 저희의 관념과 상상이 타파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의 꿈과 관념, 상상을 타파하여 너희가 더는 꿈속에서 살지 않고 현실에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요구한 것, 즉 단정하고 바르게 처신하고 착실하게 일을 처리하며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보통 사람이 되라는 진리 원칙에 완전히 부합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와 왕래하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생활하면서 나는 절대 허풍을 떨고 빈말하거나, 과시하고 우쭐거리는 법이 없다. 너희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결코 누군가에게 농간을 부리거나 일할 때 잔꾀를 부리지 않으며, 단정하고 바르게 처신한다. 이런 최소한의 양심의 마지노선은 지키려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고 행동할 때 간계를 쓰고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의 올가미에 걸려들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위해 봉사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일을 도와달라고 하고 싶으면 직접적으로 그에게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신분과 지위가 있으니 사람에게 시킬 일이 있으면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나요?” 한마디면 되는 일도 단정하고 바르게 해야 한다.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고 힘든 일을 남에게 미뤄서는 더더욱 안 된다. 네가 원하면 하고, 하기 싫으면 거부해도 된다. 하지만 나는 네게 시킬 일이 있으면 반드시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절대 완곡하게 말하거나 빙빙 돌려서 너를 속이거나 꾄 다음 네가 자진해서 나를 섬기거나 나를 위해 봉사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네게 농간을 부리고 나서 너더러 자원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호의는 사양하겠다.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동이 인간들이 말하는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든 아니면 게임의 룰이든, 혹은 남을 쥐락펴락하는 수법이나 제왕의 통치술이든, 그런 것들은 나한테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쥐락펴락하지도 않는다. 누가 사람을 쥐락펴락하든 나는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따라 하거나 배우지도 않는다. 나는 병법이나 온갖 술책 따위를 전혀 알아보지 않기 때문에 뒤통수를 치거나 사실을 호도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애매하지 않게, 분명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물론 특수한 상황이라 지혜롭게 말할 때도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사람의 연약함, 어려움을 양해해 주고 작은 분량을 양해해 주느라 그런 것이다. 사람을 지켜주고 사랑하는 것일 뿐 악의는 없으니 농간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아마 크게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세상의 유명 인사나 위인의 여러 책략을 마음에 품지도 않고 그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으셨군요. 이렇게나 단순한 분이셨다니!” 이렇게 단순하면 안 되느냐?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 곧 사람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여러 유형의 사람과 일을 처리할 줄 모른다는 의미도 아니다. 농간을 부리지 않더라도 환경이나 배경을 바탕으로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원칙에 따라 적절히, 그리고 정확하게 처리해서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아래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을 하고 저마다의 규율과 법칙 속에 존재하게 할 수 있다. 술수를 쓰거나 기만하고 사람을 농락하여 속이지 않고 말이다. 내가 일하는 원칙과 각종 문제를 처리하는 원칙,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대하는 원칙은 과거 교제와 설교를 통해 다 이야기했다. 나의 그런 교제는 구호가 아니라 내 사상과 내 인성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또한 내 사상 관점으로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처리한다. 그렇다면 내가 내 사상 관점으로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처리하거나 이 원칙들로 각 유형의 사람과 일을 처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도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육신인 나라는 사람이 아무리 정상적이고, 실제적이고, 평범하고, 하나도 신비롭지 않게 보일지라도, 절대 너희가 진리를 깨닫는 데 지장을 주거나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나 자신이 원칙을 가지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고, 성실하고 단정하며 바르게 내가 말한 원칙대로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가리키는 방향과 목표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머지않아 너희가 구원받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기에 이르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사람이 될 날이 올 것이다. 이 점은 확실하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냐? 이 외에 무엇을 더 구하겠느냐? 나라는 사람이 신비로운지, 지극히 높고 큰지, 출중한지, 너희가 생각지도 못하거나 너희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또 한 측면으로, 내가 정상적이고 실제적이어서 너희가 숭상하거나 흠모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나라는 보잘것없는 사람, 나라는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 하는 말이 너희를 확실하게 하나님 앞으로 이끌고, 확실하게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너희가 만약 내 말대로 실행하고 체험한다면 언젠가 너희의 사상 관점과 생명 성품이 변해서 새사람이 될 것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네가 새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다. 너희는 확신하느냐? (확신합니다.)
이제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의 모습을 새롭게 인식했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내 처신과 일 처리, 사상 관점이 모두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고, 아울러 내 일 처리의 원칙과 사상 관점이 언제든 너희에게 영향을 미치고 너희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내가 확실하게 말해 두겠다. 너희가 이렇게 진리를 사랑하고, 성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에서 진리를 구할 수 있으며, 성육신의 처신 원칙과 각 측면의 사상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너희의 추구와 처신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좋은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다시 말해, 믿으면 믿을수록 정상 인성이 생기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요구에도 가까워질 것이니 결국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에게 이런 수확이 생기는 것은 성육신이라는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의 양육 및 공급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본질과 모습 그리고 그의 처신 방식, 신조를 너희가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면 너희의 모습과 인성이 점점 훌륭해질 것이다. 점점 훌륭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만약 네가 점점 좋은 사람처럼 될 거라고 한다면 다소 공허한 말일 것이다. 점점 훌륭해진다는 말은 네 양심과 이성이 좋은 쪽으로 발전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모습을 무시하거나 이에 반감을 갖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경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비웃고 그에 반발한다면 너는 성육신이 선포하는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성육신이 지니고 있는 정상 인성의 실질적인 의미와 영향을 이해하기 어렵다. 반대로 너는 하나님이 정상 인성으로 선포한 모든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네가 숭배하는 것이 긍정적인 사물이 아니라 부정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유명 인사나 스타, 사회의 풍조가 네가 동경하고 숭배하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네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에 속한다. 너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쪽으로 추구하고 성장할지와 관련하여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좋은 쪽이 아닌 나쁜 쪽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람을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큰 사역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사람과 교류하고 왕래할 땐 계산적이어야 합니다. 계산적이지 않으면 사람을 주무를 수 없으니 그 사역을 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잘 들어라.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넌 끝장난 것이다. 네 사상 관점은 치우쳐 있는 것도 모자라 사악하기까지 하다. 너라는 사람은 바른길을 갈 수 없다. 네 인성 속에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넌 구원의 길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정상 인성으로 교류하다 보면 교류가 매끄럽지 않은 문제가 자주 나타날 수 있다. 여기서 매끄럽지 않다는 말이 무슨 의미겠느냐? 너는 정상적으로 교류하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이 무척 복잡하고 까다롭게 생각해서 계속 교류할 수 없을 때가 있다는 말이다. 계속 교류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왕래하지 마라. 왕래할 수 있는 사람,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 정상 인성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왕래해라. 너희를 만나면서 가장 많이 마주했던 상황은 사람들이 모두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었다. ‘당신의 신분과 지위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당신은 성육신 하나님이시고 저희는 지음 받은 인류인데, 잘못 말했다가는 대등한 위치인 것처럼 되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습니다. 또한, 당신은 성육신이시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대변하고 계시죠. 당신의 책임이나 당신이 감당하는 사역은 진리를 선포하여 패괴된 인간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사역에 관해 논의하고 신성에서 비롯된 주제를 다루셔야 합니다. 정상인의 생활이나 의식주 같은 문제, 누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런 내용을 다루신다면 당신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속셈이 있으신 겁니다.’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이 성육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정상 인성을 지니지 못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와 왕래할 때 내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의식주에 관해 조금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해서 뭐 합니까? 영적인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이야기하시는 게 아닌가요?” 만약 어떤 사람의 상황을 언급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뒤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계산하는 거 아닌가? 그를 노리는 거 아냐? 그를 발탁하려는 걸까? 아니면 도태시키려는 걸까? 계속 그를 쓰려는 걸까? 아니면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걸까?’ 만약 어떤 사람의 문제를 언급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싫어하고 그에게 반감을 품고 계신 거 아냐? 그가 하나님께 해가 되는 짓을 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하나님께 노여움을 살 말이나 행동을 했나?’ 특히 리더 일꾼과 관련된 민감한 주제를 꺼내면 어떤 사람들은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런 주제를 언급하시는 건 사역을 위해서겠지만 저희는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민감한 주제거든요. 정확하게 말씀드리지 않으면 당신께서 저희까지 폭로하고 책망하실 테고, 저희의 패괴 표출이 안 좋은 인상을 남기게 될 텐데, 이건 적절하지 않아요.” 또 어떤 주제를 언급할 때, 가령 내가 “너희 가족 중에 누가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이는 중국 본토에서는 민감한 주제이다. 하지만 본토에서 함께 지낸 시간이 비교적 길고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람끼리 묻는다면 이를 그다지 민감한 주제라고 할 수 없고, 해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주제에 관해 내가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가족 중에 누가 믿는지 물어보시는 건 내 속사정을 알아보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 그에게 “너희 현지 교회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느냐? 교회 리더가 누구냐?”라고 물으면 그는 ‘이런, 지금 교회 실태를 알아보려는 거 아냐? 말씀드릴 수 없어. 말씀드렸다가 교회 리더가 알게 되면 귀찮아질 거야.’라고 생각한다. 교회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경계하며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는 걸 보아라. 많은 사람이 교회 리더, 교회 사역과 관련된 주제를 선뜻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자유롭게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교회의 실태를 실토했다가 리더 일꾼에게 미움받을까 두려운 것이다. 아울러 무심코 자신의 사상 관점을 밝혔다가 책망받고 폭로 당할까 봐 걱정도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왕래할 때 평범한 교류조차 매끄럽지 않은 것이다. 이방인과 왕래하고 일을 처리하면 이방인은 생각이나 배경이 복잡해서 용무가 끝나면 서둘러 가버리니 그와 깊게 교류하거나 긴밀하게 접촉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형제자매와 왕래하는 건 어떻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로 긴밀하게 접촉할 수 없고 깊이 교류할 수 없다. 내가 높은 지위에 있어서 많은 사람과 왕래하기를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가까이 가서 그들을 만나려 하면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피하거나 달아나기 때문이다. 왜 나를 피하느냐? 네가 말실수한다고 해도 너를 정죄하거나 원칙에 따라 비판하지는 않는다. 네가 리더 일꾼이라면 함께 진리를 교제해 보고, 네가 이해하지 못한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네가 만약 보통 형제자매인데 정말 말실수하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이럴 경우는 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해줄 마음이 있는지에 달렸다. 내가 봤을 때 네 자질이 떨어져 이해 능력이 없고, 아무것도 간파하지 못한다면 너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설령 이야기해 준다고 해도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자질이 좋고 이해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일을 간파할 줄 알 경우 네게 이야기해 주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서 말해준 보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와 한담하든 그리고 어떤 문제를 발견하든, 나는 속으로 전혀 정죄하지 않을뿐더러 저주하지도 않고 사람의 결말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이는 근거 없는 행동이다. 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정상 인성의 측면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하고 한담하고 싶을 때가 있다. 네가 원한다면 이야기하겠지만, 원치 않는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한담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하든 경계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는 아무런 관점을 밝히지 않는다. 말실수해서 나한테 꼬투리 잡힐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네가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으면 나는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겠다. 네가 날 경계하기만 하고 농간을 부릴까 봐 걱정하기만 한다면 나도 너와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대답해 보아라. 나의 이런 이성이 정상이 아니냐? (정상입니다.) 내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교류할 때는 항상 저마다의 배경이 있다. 가령 네가 농장에서 사육을 담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육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고, 네가 교회 리더라면 우리는 교회의 일, 형제자매의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현재 형제자매의 내적 상태가 어떤지, 교회 생활은 어떤지에 대해서 말이다. 또 네가 만약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복음 사역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들은 정상 인성의 범위에서 왕래하는 것이며 이것이 내 사역이기도 하다. 어떤 일들은 교회 사역과 관련은 없지만 하나님 집의 사무이기도 하다. 만나서 이런 일에 관해 한담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일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있으니 너를 만나면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하면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사람들과 한담하다가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요즘 저녁에 쌀쌀하던데 집이 춥지는 않으냐?” 내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다 큰 어른인데 뭐 하러 참견하실까?’ 은혜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냐? 때로는 주방에 가서 이렇게 물어보기도 한다. “올해 채소가 어떠냐? 먹기 부족하지는 않으냐? 너희는 어떤 채소나 음식을 좋아하느냐?” 이는 모두 정상적인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도 복잡하다. 정상적인 왕래나 소통이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사람이 늘 문제가 들통날까 봐 걱정하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날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내가 만약 내 실상을 밝히면 예배 설교 시간에 나를 폭로하고 타깃으로 삼겠지.’ 너를 타깃으로 삼으면 안 되느냐? 네 문제에 맞춰 진리를 교제해서 네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건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느냐? 네게는 행운이 아니냐? 잘된 일이다. 이는 내가 너를 중시하고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맞는 말이 아니냐? 내가 만약 너를 거들떠보지 않고 마음속에 너를 두지 않는다면, 네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을 보고도 외면한 채 네게 지도해 주거나 교제해 주지도 않는다면, 네가 진리를 깨달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되고 싶으냐? 만약 그렇게 했더니 네가 무척 흡족해하면서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모든 문제는 다 나랑은 관련 없는 이야기야. 나한테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지.’라고 생각한다면, 네가 만약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다면 너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어떤 책망과 훈계도 받아본 적이 없고 한 번도 부각물이 되어본 적도 없다며 이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매우 훌륭하고 아무 문제도 없어서 구원받을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골칫거리가 아니냐? 이런 사람은 분명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정상 인성의 사고를 지닌 사람은 정상 인성으로 남들과 소통하고 왕래할 때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라는 감각을 따른다. 이런 감각을 가진 그는 최소한의 선과 원칙을 가지고 남들을 대할 것이다. 정상 인성의 사고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왕래하면 남들에게 인간적인 양심의 지각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기준을 가지고 행동하니 다른 사람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또 중요한 한 가지는 네가 사람들과 교류하고 상호작용할 때 네 말을 통해 다른 사람이 득을 보고, 인성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왕래라고 하고, 교류라고 한다. 무엇을 교류라고 하느냐? 쉬운 말로 한담을 나누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담을 나눌 줄 모른다. 말만 했다 하면 다투고 설전을 벌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말을 들으라고 남들을 훈계하기 십상이다. 말주변이 좀 있는 사람은 입만 열면 자기가 선생이라도 되는 양 설교하려 든다. 이런 모습은 모두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사람이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으면 남들과 정상적으로 한담을 나누지 못한다. 설사 잠깐 정상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하고 언제 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신나게 싸울지 모른다. 이는 정상적인 한담이 아니다. 정상적인 한담은 시비를 따지거나 옥신각신하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절대 아니며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한담을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를 한담이라고 한다. 이 정의가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합니다.) 어떤 점이 정확하냐? 정보의 교환이나 공유는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들이 어떻게 한담하고 교류하는지 보아라. 그들은 다투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상대방이 득을 보게 한다. 상대방이 해준 말을 듣고는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상대방에게 알려줘서 상대방에게도 득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상대방은 인성 면에서 경험을 쌓고 식견과 견문을 넓히게 된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과 평등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원칙에 따라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상대방에게 공유해 주고 상대방이 자기에게 공유해 주는 정보도 얻는다면 이것이 상부상조가 아니겠느냐? 이는 평등, 공조, 화목, 공평을 바탕으로 한다. 이를 교류와 한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답해 보아라. 내 정의가 정확하지 않으냐? (정확합니다.) 이를 원칙으로 한담하고 교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교류와 한담이 농간, 고집, 다툼, 음모, 간계, 함정, 시험으로 가득하고 표출되는 것이라고는 모두 패괴 성품이나 상호 억압뿐이라면, 그리고 저마다 우쭐거리면서 누구의 말이 더 대단하고 누가 더 말을 많이 하는지 비교하고 다툰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교류가 아니며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교류가 아니다. 이런 교류는 정보의 교환이나 공유가 아니라 음으로 양으로 싸우고 설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남들과 교류하면서 농간을 부리지 않으려면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교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류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동시에 상대방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득을 보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교류이다. 이렇게 교류하면 농간이 배제될 수 있다. 생각해 보아라. 이방인이 교류하고 한담할 때 정상적인 교류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패괴된 인간이 교류하고 한담할 때 그 교류의 내용이나 출발점, 말투가 정상적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들의 교류는 그야말로 투계나 투견 같은 싸움질이다. 그들 간의 교류가 순조롭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들은 농간을 부리거나 충돌하지 않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 교류가 순조로워지려면 사랑하는 마음과 상부상조하고 서로 배우며 보완하려는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와 너희가 교류하고 한담할 때 나 혼자만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너희도 이 원칙에 따라 실행해서 농간을 부리지 말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농간을 부리지 않는데 너희는 늘 부린다면, 그리고 너희 자신이 농간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면 우리의 교류는 순조로울 리 없으며 유익하고 진정한 상호 작용을 할 수 없을 것이고, 화목하게 지낼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오는 것을 보면 즉시 숨을 곳을 찾는다. 도저히 숨을 곳이 없으면 마지못해 인사는 하지만 속으로는 만나기 싫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귀찮아 죽겠네. 또 우리 실상을 파악하러 오셨나 봐. 파악하고 나면 또 진리 원칙을 교제해서 난처하게 만드시겠군. 이를 어쩐담?’ 나를 만나거나 나와 왕래하는 게 싫다면, 또 나와 왕래하면 마음이 너무 지치고 늘 내가 농간을 부리려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를 보고 피해도 된다. 그런데 만약 네 생각에 나와 왕래하면 내가 농간을 부리지 않아서 네 마음이 편하고 즐거우며 자유롭고 해방감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만나서 한담하고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네가 내게 “요즘 잘 지내시죠?”라고 묻는다면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고, 내가 네게 “네 근황은 어떠냐? 생명이 성장하였느냐? 본분 이행에 수확은 있었느냐?”고 물으면 너도 사실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직한 모습이다. 매번 부드럽고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이 나만 보면 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말할 때마다 굽신거리면서 의도적으로 아부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느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 바람직하지 않냐? (아첨을 잘하는 것은 속임수에 해당하니 현실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상적인 마음가짐으로 대하면 됩니다. 한편으로는 진솔하게 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첨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거나 알랑방귀를 뀌지 말아야 합니다.) 내 요구는 하나뿐이다. 내가 너를 봤을 때 나를 피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널 찾지 않을 때는 나한테 달라붙지 말고 네 할 일을 해라. 모든 게 정상이면 너희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지 않을 테니 너희도 나한테 지장을 주지 마라. 나를 피하거나 나한테 달라붙는 것은 모두 나와 접촉하고 왕래하는 원칙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교류하면서 진솔하고 사실대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묻는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해야 한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느냐? 가령 내가 네게 “이번 달에 복음을 전해서 몇 명이나 얻었느냐?”고 물었는데 네가 대답하기 싫어한다면 나는 네가 그렇게 난처해하는 걸 보고 묻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결코 사람에게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남들이 어떤 질문을 하든 늘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라고 고민한다. 그는 바로 답하려 하지 않는다. 잘못 대답했다가 문제가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늘 이렇게 추측하고 농간을 부린다면 우리는 교류할 수가 없다. 너는 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자꾸 연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내게 농간을 부리지도 마라. 단순하게 마음을 열고 속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함께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으냐? (쉽습니다.) 말이 쉽지 막상 하려면 조금 어려울 것이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내가 너한테 질문을 했는데 그때 네가 사실대로 답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그 만남의 교류가 무산되었다. 무산되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다음에 만나면 “지난번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라고 용기를 내서 인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를 격려하고 손뼉 쳐주며 엄지를 치켜들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여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는 의미로 말이다. 정말 바람직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농간을 부리지 않는 측면의 주제에 관해 얼마나 많은 사례를 교제했든 그것은 너희에게 한 가지 원칙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무슨 원칙인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을 대할 때 패괴된 인간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패괴된 인간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대하지 마라. 그러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느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대하면 안 되느냐?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은 안 되느냐? 네가 그를 하나님으로 대하든 사람으로 대하든, 사람 간의 왕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진솔하게 대하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말하고 행동할 때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 너 역시 나를 이렇게 진솔하게 대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네게 농간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면 너도 그에게 농간을 부려야 하겠느냐? (아닙니다.) 네게 농간을 부리는 사람이 있어도 원칙에 따라 그를 대해야 한다. 그것이 옳다. 단지 내가 너에게 농간을 부리지 않으니 너도 나를 진솔하게 대하고 농간을 부리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네게 농간을 부리더라도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대응한다면, 이것이 바로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제게 농간을 부리는데 보복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에게 쓴맛을 보여주지 않고 이렇게 저를 괴롭히게 놔둔다면 저만 손해 아닌가요? 제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입니까?” 대답해 보아라. 그의 이런 논리가 통하겠느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통하는 말이지만 진리로 판단하면 이는 틀린 말이다. 그가 네게 농간을 부린 것은 악행이다. 반대로 네가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농간을 부려 보복한다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악행이다. 하나님은 그가 네게 농간을 부렸다고 해서 네가 그에게 앙갚음하는 것이 마땅하다거나 원칙에 부합한다거나, 악행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무엇 때문에 그에게 농간을 부리는지 살피지 않는다. 너의 그 행위 자체가 농간인지, 악행인지, 그리고 네가 그 일을 진리로 판단하는지 아니면 사람의 윤리관으로 판단하는지를 살핀다. 만약 사람의 윤리관으로 판단한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그가 먼저 너에게 농간을 부렸으니 너도 똑같은 수법으로 그에게 보복하고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는 그렇게 죗값을 치러야 한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윤리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고, 법적으로 봐도 위법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는 진리에 위배된다. 그리고 진리에 위배되는 일은 악행이며 하나님에게 정죄된다. 설사 네가 앙갚음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네 앙갚음이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합당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네게 농간을 부리고 나서 네가 어떤 방식으로 그를 대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만약 네가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대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진리 원칙으로 그를 대하고, 하나님이 가르쳐 준 방식으로 공평하고 공정하게 그를 대한다면 도덕적으로 사람들이 관념을 품고 정죄하고, 법률적으로 정죄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네 이런 행동은 원칙에 부합한다. 악행이 아니니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할 때는 관념이나 상상, 혹은 패괴 성품으로 대하지 않고, 그에게 음모를 꾸미거나 간계를 쓰지도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네가 그리스도라는 평범한 사람을 올바르게 대할 수 있고, 사람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대할 수 있어서 어떤 사람이든 올바른 태도로 대한다면 사람을 대하는 네 방식과 원칙은 올바른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네 태도나 사상 관점이 잘못되어도 네가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스스로 반성하고 네 사상 관점을 바로잡는 동시에 끊임없이 네 행동을 단속한다면, 사람을 대하는 네 사상 관점, 그리고 네 처신과 일 처리 원칙이 점차 진리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진리 원칙이 네 생명이 되면 너는 패괴 성품을 벗어버리고 변화되어 사람을 공평하고 공정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네게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면 너는 상대방에게 농간을 부리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네게 농간을 부리는데도 너는 그에게 그러지 않고 진리를 구해 진리 원칙에 따라 그를 대한다면 이는 성장이고 변화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네게 농간을 부린다고 너도 그에게 농간을 부리려 한다면, 네가 가는 길이 네게 농간을 부리는 사람이 걷는 길과 똑같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게 무엇이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는 네 관점에 변화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의 원칙을 따라 네게 농간을 부리는 사람이 있으면 너도 그에게 농간을 부리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나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반면 상대방이 네게 농간을 부리든 말든, 그에게 농간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입장과 관점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은혜시대에 예수님이 사람에게 뭐라고 하였느냐? 남이 네 오른뺨을 때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절 때리면 되갚아 줘야죠! 그가 제 왼뺨을 때리면 저도 그의 왼뺨을 때리고, 그가 제 오른뺨을 때리면 저도 그의 오른뺨을 때릴 거예요. 그런다고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정죄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니다. 그가 네 왼뺨을 때리면 너는 보복하지 말고 오른뺨도 그에게 대주어라.”라고 말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일부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말, 미련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요구가 사람이 보기에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그것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못 해요. 그가 제 왼뺨을 때린다면 전 꼭 되갚아 주고 말 거예요. 안 그러면 제 인격과 존엄이 모두 무너지는걸요. 제 체면도 구겨질 거고요.”라고 대답한다. 너의 이 말이 패괴된 인간 사이에서 성립되든 말든, 하나님 관점에서 너의 그 말이 잘못되었고, 네 관점이 잘못되었으며, 네 행위가 잘못되었다면 네 행동은 정죄된다. 정죄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누군가 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대주라고 했는데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이 물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느냐?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대로 실행했느냐? 네가 실행하지 않았다면 너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은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좋아하지 않을 테니 너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 관점에서 네가 따귀로 앙갚음하는 것은 악행이다. 너는 영원히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자기 존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겠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따귀를 때린 것은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도리이자 공염불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만 할 뿐 결코 실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는 자로 규정할 것이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네 생명이 될 수 없다. 네가 아무리 자기 논리를 펼친다고 해도 하나님은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남한테 왼뺨을 맞다니, 불쌍하기도 하지. 네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의 뺨을 때려도 좋다. 때리고 나서 기도하고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이 용서하고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누군가 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대주라고 할 때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도를 준행하는 사람이고,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 관점에서 너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않는 사람, 즉 악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어떤 태도로 악인을 대하느냐? “내게서 떠나라! 난 너희들을 모른다.”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필요 없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농간을 부리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는 “그가 제게 농간을 부렸는데, 제가 그에게 농간을 부리는 게 무슨 잘못이죠?”라고 말한다. 네가 남에게 농간을 부린 것은 잘못이다. 어떤 점이 잘못되었느냐? 농간 자체가 선행이 아닌 악행이기에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남에게 농간을 부리면 하나님이 그를 정죄할 것이고, 네가 똑같은 짓을 저지른다면 너 역시 하나님이 정죄할 것이다. 너는 농간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행동해야 한다. 네 본분은 하나님이 네게 알려준 실행의 길과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이지, 네 논리를 펼치거나 너 개인의 존엄과 체면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너 개인의 체면이나 지위, 존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네가 실천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는지,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네게서 성취되는지 여부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절 욕했으니 저도 그를 욕하겠습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옳은 말이냐? (옳지 않습니다.) “그는 늘 제게 따지고 드는데 왜 저는 그에게 따져서는 안 되나요? 제가 따지지 않으면 멍청해 보일 것 아닙니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냐?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늘 체면을 따지고, 자기가 멍청하고 어리석게 보일까 봐 걱정한다. 사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무엇이냐? 그가 너를 멍청하고 어리석게 보거나 비웃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혈기로 대하고 사람의 방법이나 술수로 대해야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알려준 원칙대로 대해야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했느냐? 네 본분을 지켰느냐? 너는 그가 자기를 멍청하다며 비웃었다고 해서 “내가 멍청하다고? 안 해!”라고 성질을 부리면서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다. 그에게 해주는 일도 아닌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느냐? ‘남들이 자기한테 멍청하다고 했다고 내가 준 본분을 내팽개치다니, 너는 충성심도 없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네 마음속에 정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면, 누가 자기를 보고 멍청하다고 비웃든 이런 생각부터 할 것이다. ‘나보고 멍청하고 어리석다고 뒤에서 비웃지만, 난 당신과 싸우지 않을 거고 당신에게 따지지도 않을 거야. 나는 어리석고 자질도 떨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고 높여 주셨어. 내 본분은 당신이 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거야.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한 거라고. 당신이 날 우러러보든 말든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당신한테 보여주려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도 아닌걸. 본분 이행은 내 사명이야. 난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해. 그리고 이 본분을 소중히 생각해야 해. 나를 높여 주시고 신뢰해 주신 하나님을 뵐 낯이 있으려면 본분에 충성을 다해야 해. 당신이 나보고 멍청하다고 했다고 본분을 내팽개쳐서 하나님께 죄송한 짓을 저지를 순 없어. 그거야말로 진짜 멍청한 짓이지.’ 이런 생각이 원칙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혈기를 내려놓는 게 아니겠느냐? 이것이 바로 혈기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이럴 수 있다면 그때 진정으로 변화되고 분량이 생긴 것이다. 사람과 일에 구애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가슴에 새겨서 그 어떤 일도 혈기나 감정, 기분, 사적인 기호, 욕망, 야심으로 대하지 마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속에서 가장 높고 크게 여겨서 어떤 일이 임하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확실하게 지켜야지. 남들이 날 멍청하게 생각하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날 어떻게 보시냐지. 비록 난 어리석고 자질도 떨어지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이행할 본분을 주셨어. 하나님께서 날 얼마나 높여 주셨는지 몰라. 이건 복이야!’ 네 주변에 임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할 수 있다면 너는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어서 음해하지 않는 것에 관해 교제해 보자.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고, 사람은 그 일 때문에 항상 남에게 음해를 당한다. 너와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시비를 따지는 사람들이 있으며, 심지어 말 한마디 때문에 너와 충돌하는 사람이나, 뒤에서 너를 판단하고 망치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네게 훼방을 놓거나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갖가지 사람의 음해에 직면할 때, 이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한 가지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남들이 아무리 음해해도 난 그들을 음해하지 않고 멀리하겠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게 어떤 공과를 배우게 하시려는지 깨달아서 내 입장을 굳게 지키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며 내 본분을 지킬 거야.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따르는 것은 언제나 옳아. 나한테 손해도 아니고. 사람들이 아무리 우러러본다 한들 그건 면류관이나 상이 아닌걸. 그건 재앙일 뿐이야!’ 이 원칙을 지키면 악행을 저지르거나 하나님에게 정죄당하지 않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평생 피조물의 지위를 굳게 지키고 피조물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성심성의껏 수행할 수 있다면 네가 침식을 잊든, 심혈을 기울이든 상관없다. 온 마음을 본분 이행에 쏟아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제대로 수행함으로써 본분 이행에 합격한다면, 넌 값진 인생을 산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서 대단한 일, 사업 등을 하거나 기적 따위를 일궈 내는 것을 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면 그 일에서 진리를 깨닫기를 구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 한다. 모든 일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자기가 이행하는 본분이 사역 지침이 요구하는 원칙에 부합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의 출발점과 목적, 원칙이 하나님 말씀의 요구에 부합해서 문제가 없고, 하나님의 점검을 통과하게끔 꼼꼼히 살펴야 한다. 매일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평안과 기쁨을 얻으며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마음속에 하나님에게 할 말이 있으면 기도하고, 기도할 말이 없어도 마음으로 하나님과 친밀해질 수 있는 것, 기도하여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 감동을 얻고 본분을 이행할 때도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으며 당당하게 처신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좋으냐? 그러면 사람을 대하고 사람들과 왕래하며 교류할 때 기본적으로 오점이나 과오가 점점 줄어들 것이고, 남들이 아무리 자기를 음해해도 혈기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또 힘겨울 때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연약할 때도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성령에게 감동받고 힘을 얻어 극복한다면 그 고비를 넘기게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남들의 음해나 공격, 보복 등에 직면할 때마다 고비를 넘기거나 난관을 돌파하는 것처럼 결국 그 음해와 남들의 공격, 보복, 싸움을 이겨낸다면, 혈기나 패괴 성품으로 대하지 않고 원칙을 지킬 수 있다면, 너는 진정으로 이기는 자일 것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지만 네가 온종일 혈기나 패괴 성품 속에서 살아간다면, 누가 너를 음해하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할 때 마음에 두고 몹시 신경 쓸 것이며, 그러다 감정이 격해져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노발대발할 것이다. 혹여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기라도 하면 불안한 마음에 입에 거품을 물고 식음을 전폐하거나 밤잠을 설치며 하나님을 멀리할 것이다. 혈기가 아니면 기분에 따라 살아가니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라 하나님 말씀을 정상적으로 먹고 마실 수 없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도 없다. 또 마음속이 이런 시시비비에 관한 일로 가득하고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그런 것에 한 번 얽매이면 벗어나기 어려우며, 심지어 몇 달 동안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결혼이나 송사와 같은 큰일이라면 더 심각하게 골몰하다가 그 일에 얽매인 채 몇 달, 몇 년의 세월을 보낼 것이다. 가장 좋은 시기를 망쳐 버리는 것이다. 너는 일생을 헛되이 보내느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뿐더러 진리도 얻지 못했으니 쓸모없는 사람 아니겠느냐? 온종일 시비, 남들과의 음해와 다툼, 실랑이에 빠져 사는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는커녕 음해하고 다투면서 악행만 늘어날 것이다. 사람 간의 음해와 다툼 속에서 살아가면 어느 정도 나쁜 짓을 하게 될 것이고, 주제넘은 말이나 패역한 말, 진리에 어긋나는 말,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얼마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모두 마귀에게 속하는 말이다. 비록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도 있겠지만, 그 역시 네 머릿속에서 가공될 테니 속으로는 남을 증오하고 욕하며 저주하게 된다. 이것들이 하나님 눈에는 빠짐없이 보인다. 하나님은 일이 일어났을 때 네가 어떻게 계획하고 계산하고 실행하는지 지켜본다. 너는 이런 음해나 다툼 속에서 살면서 결코 반성하고 하나님에게 회개하며 죄를 시인하거나, 그 일에서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오로지 ‘즐기기’만 한다. 몸과 마음이 지쳐도 결코 반성하거나 하나님에게 기도해 그의 가르침과 인도를 통해 마음속으로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권세를 잡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겠노라 마음먹지도 않는다. 이는 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여 사람다운 삶을 살아낼지에 집중한다.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 다툼과 음해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테니 마음이 항상 하나님과 가까워질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어 결과적으로 본분 이행의 성과가 점점 좋아질 것이다. 또한, 마음속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값진 삶이고 인간에게 기여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진실한 평안과 기쁨이 깃든다.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기에 매일의 삶이 진실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온갖 다툼과 음해 속에서 살아간다면 네 매일의 삶은 죄악으로 점철될 것이다. 피조된 인간이 살아야 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앞날에 죄악만 쌓아 간다면 너는 점점 하나님의 눈 밖에 날 것이고, 점점 실망만 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기에, 너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 네게 걸었던 하나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네가 그런 행동을 해서 하나님을 점점 실망시키고 가슴 아프게 한다면, 네가 언젠가 정말 뉘우치지 않아서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고 싶게 한다면, 너라는 사람의 삶과 믿음에 어떤 가치나 의미가 있겠느냐? 살아가는 게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너는 남들이 너를 음해하고 판단했다고 해서 본때를 보여주고 네 체면과 존엄을 회복하려 야단법석을 피우다가 해야 할 일을 그르친다. 심지어 때로는 남들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거나 눈치를 줘서 불쾌하고 체면이 구겨졌으며 자존심이 상했다며 불만을 품고 끝도 없이 그들과 충돌한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소중한 시간을 그런 일에 낭비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날려 버리게 되고, 진리는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은 너를 버리고 더는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버려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무엇을 알려주려 이런 것들을 교제하겠느냐? 어떻게 처신하고 어떤 방식으로 처신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늘 음해와 다툼, 개인의 이익에 대한 침해, 온갖 비난과 판단, 정죄의 목소리와 마주하게 된다. 누구든 이런 일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나 또한 인간 세상에서 이 나이까지 진공상태에서 산 것은 아니며, 똑같이 그런 일에 직면하지만 음해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아라. 그런 일이 내 삶과 사역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다. 나는 매일 오직 내 사역을 하는 데만 집중하며, 지금까지 살면서 외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 신분과 지위, 사람들 눈에 비치는 내 가치는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을뿐더러 너희가 나를 위대하고 비범하며 출중하다고 오해하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너희가 나를 숭배하지 않게, 나에 대해 비현실적인 상상이나 관념을 갖지 않게, 정상적이고 실질적이며 평범한 실제 사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 주겠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내가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어 냉담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난 개의치 않는다. 그저 내 말을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된다. 다른 요구는 하지 않는다. 너희가 온종일 나를 지켜보고 연구하며 내 눈치를 살피면 내가 자유롭지 않을 것 아니냐. 나는 사람들이 나를 숭배하거나 아첨하는 것을 싫어한다. 더욱이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앞뒤로 호위하며 떠받드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난 조용한 게 좋다. 보아라. 나는 요즘 무척 잘 지내지 않더냐? 너희도 한번 이렇게 살아보면 어떻겠느냐. 명예나 이익, 지위를 다투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지 않으며 발언권 따위를 다투지 않고도 네가 살아갈 수 있는지 살펴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이나 요구대로 행동하고 살아가고, 또 처신하고 일 처리하며 본분을 이행하면서 네 삶이 어떤지, 기쁨을 얻고 마음에 평안이 있는지 살펴보아라. 삶의 방식을 바꿔서 진리 원칙대로 실행해 보아라. 목표가 분명해지면 밝은 앞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너를 음해하는 사람, 네 지위에 영향을 주는 사람, 너보다 명성이 대단한 사람, 뒤에서 너를 문제 삼는 사람 등이 있다고 따지기만 하면서 이런 일에 빠져 산다면 앞이 어두컴컴하고 길이 보이지 않아 늘 막막할 것이다. 그리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행복하지도 않고. 난 복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준 복을 누리지 않고 지옥으로 돌진하기만 하는데 네게 복이 있을 리 있겠느냐? 기쁨과 평안이 있을 리 있겠느냐?
이런 주제에 관해 교제하는 게 어떠냐? (좋습니다.) 어떤 점이 좋으냐? (실생활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음해하지 않으면서 사람이나 일에 구애받지 않고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길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 원칙들을 교제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단지 다른 사람과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상 인성 속에서 정상 인성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네 생명이 되게 하여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단순히 남들과 음해하고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만약 단순히 음해하고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진리를 얻지 못하면 사람의 실행 목표가 어떻게 되겠느냐? 공허해지지 않겠느냐? 사람이 이런 사회, 이런 사람들 가운데 살다가 일이 생기면 그것에 대해 늘 자기 생각과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진공 상태에서 사는 것처럼 아무 생각이나 관점이 없을 리 없다.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너를 음해하지 않고 너와 다투지 않는다면 너도 남들을 음해하지 않고 남들과 다투지 않을 수 있겠지만, 너를 음해하고 너와 다투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네가 그저 “그와 싸우지 않고, 그를 음해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구호만 외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어떤 사람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음해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역하신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음해하시나요? 음해해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라며 구호를 외친다. 이렇게 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해결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일이 일어나면 마음속으로 내려놓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음해하며 그들과 다툰다. 그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의 생각과 관점에 관한 문제, 사람의 패괴 성품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네가 올바른 생각과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런 일에 대한 관점과 태도, 입장이 변하고, 마음속에서 이런 일을 대하는 느낌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이 무의미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며 사역을 그르친다는 생각에 괴로운 마음이 들고 기쁨과 평안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런 일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정죄를 살펴보아 이 일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변하면 마음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과 다투려는 의욕이나 분노가 사그라들며, 혈기도 사라진다. 또 남들이 너와 다투면서 계속 도발해도 너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별일 아니라고, 남들과 다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답답해서 “그가 당신을 저런 식으로 대하는데 어째서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거죠? 바보 아녜요?”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꽤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죠. 그 사람에게 제 생각이 분명하게 전달되거나 그가 저한테 해명하기 전까지 가만있지 않았죠. 그런데 이젠 달라졌어요. 그 사람을 음해하거나 그와 다투지 않아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 말씀 속에서 인간 패괴의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이죠. 그의 저런 모습은 하나님 말씀이 폭로한 전형적인 악인, 적그리스도, 사탄의 모습이에요. 예전엔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지만 이젠 그것이 너무도 추하고 역겨운 모습이고 성품이라는 것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고요! 이젠 저도 혐오스러워서 패괴 성품 속에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그가 또 덤비면 싫은 마음이 들고 역겨워져서 싸울 마음도 사라지고 싸우기도 싫더군요.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 원칙도 찾아봤는데 이런 부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뭐라고 말하더냐? 첫째, 이런 부류는 하나님 말씀에 폭로되고 규정되어 있다. 둘째, 사람을 대하는 원칙에 있어 하나님은 ‘공평하게 대하라’고 알려주었다. 만약 진정한 형제자매가 패괴를 표출한다면 우리는 그를 도와 하나님 앞에 데려가서 그 과오를 해결함으로써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문제가 우리의 도움으로 해결된다. 만약 그가 도움을 받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못하지만,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교회 사역도 교란하지 않는다면 계속 교회에 머물게 해서 본분을 이행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남들과 다투고 남들을 음해해서 교란을 일으킨다면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과 사람을 대하는 원칙에 따라 그를 정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평온해지지 않겠느냐? 해로운 자들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 집에는 원칙과 길이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어떻게 분별하고 처리하며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 말씀 속에 원칙과 길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여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처리하면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마음에 아무런 교란도 받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몇 년 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냥 넘기지 못했을 것이고,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년의 생명 체험을 겪자, 이런 일에 부딪혀도 어려워하지 않고 해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문득 네 분량이 커졌고, 진실한 변화가 생겼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대답해 보아라.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심정이겠느냐? ‘예전엔 늘 내 자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어. 항상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기까지 해서 구원받지 못할 것 같았지. 그런데 이젠 이 일을 처리할 때 어려움이 없네.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희망이 생긴 것 같아.’ 어떤 희망이겠느냐? (구원의 희망입니다.) 구원의 희망이 보일 때 앞날이 환하겠느냐? 아니면 어둡겠느냐? (환할 것입니다.) ‘광명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네 분량이 이런 수준에 도달하면, 진리를 실행할 때는 구호를 외칠 필요가 없음을, 이토록 가볍고 즐겁게 할 수 있음을 진정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진리 원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렇게 쉽게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분량 또한 부지중에 이렇게나 커진다. 네가 네 분량이 커지고 변화가 생겼다고 느끼고, 최근 네 믿음에 수확이 생겼다고, 헛된 믿음이 아니라고 느낄 때, 누군가가 또 “제가 하나님을 믿어서 얻은 게 뭐가 있나요? 저는 20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고생하며 힘을 썼고 또 그토록 많은 것을 버리고 바쳤는데 아무런 복도 누리지 못한 채 고생만 실컷 했어요!”라며 주제넘은 말을 한다면 넌 속으로 ‘양심도 없는 사람이네. 마귀적인 말을 늘어놓다니!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정말 아무것도 얻지 못한 모양이야. 횡포랑 억지만 부릴 줄 알고, 주제넘은 말만 늘어놓고 있잖아!’라며 경멸할 것이다. 그는 늘 “하나님을 믿어서 제가 얻은 게 뭐가 있나요?”라고 한다.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물질적인 은혜와 축복을 받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진리를 얻어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냐? 이는 하나님을 믿을 때 선택해야 할 길이다. 도대체 너는 어느 길을 가고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네가 깨달은 진리를 너의 실제로 실행해 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체험한다면 네 믿음은 헛되지 않다. 반면, 단순히 은혜를 누리는 데만 집중하느라 진리와 생명을 얻지 못해 “제가 얻은 게 뭐가 있나요?”라며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다. 얼마나 많은 은혜를 누리든, 진리를 하나도 얻지 못한다면 네 믿음은 너무도 형편없는 믿음이며 이는 네가 눈먼 자임을 의미한다. 지금 하나님은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며 날마다 새로운 말씀을 전하고 있다. 사람이 영원히 다 먹고 마시지도, 누리지도 못할 만큼 말이다. 실행하고 진입해야 할 진리가 산더미이고, 평생 체험해도 다 체험하지 못할 만큼 진리가 무척 많다.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한 사람은 너무도 많은 것을 풍족히 얻었다. 그런데도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생각만 한다. 진리를 누리는 사람은 그 말씀들이 정말 소화하기에 차고 넘칠 정도라고 생각한다. 지금, 진리의 측면에서 보든 물질적인 축복의 측면에서 보든 하나님은 사람에게 넉넉하게 내려 주니, 하나님 집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 때 먹고 마시는 하나님 말씀은 정말 넉넉하다. 체험 간증, 영화, 찬양, 율동 등 다채롭고 풍요롭다. 물질적인 것인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 또한 넉넉하다. 또 하나님이 배치한 큰 붉은 용의 봉사, 적그리스도와 거짓 리더의 모습, 온갖 부정적인 것이 날마다 사람 앞에 나타나 공과를 배우게 하고 분별력을 키우게 한다. 미처 한 번에 다 배우지 못하면 곧이어 환경과 사람, 일을 배치해서 너희가 공과를 충분히 배울 때까지 유지해 준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대한 잔치에 가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다. 몇 년만 믿으면 큰 발전이 있을 것이고 진실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이 최근 몇 년간 하나님의 선민을 친히 목양하고 양육하며 이끌었으니,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너무도 많은 것을 얻었으며 진실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느낄 것이다. 특히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그 변화가 더욱 커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가면 갈수록 환하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진실하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속으로도 진리 실행을 원치 않는다면 너에게 구원의 희망이 있음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자꾸만 주변 사람에게 “제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요?”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다 누가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 보여요.”라고 하면 ‘망했다. 희망이 없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너는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다면, 차츰 영적인 이해력이 생길 것이고, 영적인 이해력이 생기면 깨닫는 진리가 점점 늘어나 어떤 측면의 체험 간증이든 다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네 내면이 풍족하고 충실해졌다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얻은 것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리를 생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그 내면은 늘 갈팡질팡하고 막막할 것이며 진실한 믿음도 없어서 항상 주위 사람에게 자기에게 구원의 희망이 보이는지 묻기만 할 것이다. 또한, 자기한테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물으면서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희망이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답해 보아라. 이런 사람은 멍청하지 않으냐? (멍청합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든 없든 너는 진리에 이르러야 한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물론,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도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만약 진리를 깨닫고 또 실행할 수도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오늘 교제는 여기까지 하겠다. 다음에 보자!
2024년 9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