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8)
지난 며칠간 우리는 ‘각 측면의 자질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관해 교제하였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자질의 각 측면, 각 단계의 구체적인 모습을 교제함으로써 자질이 좋은 것이란 무엇인지, 자질이 평범한 것이란 무엇인지, 자질이 부족하고 없는 것이란 무엇인지 등을 정리했느냐? 이 측면의 내용은 무척 많이 교제했으니, 정리한 후 일상생활에서 자신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자신과 타인을 가늠하면 상대적으로 정확할 것이다. 이것을 정리해 내지 못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이 각 측면에서 드러내는 모습도 분별하지 못할 텐데, 이는 헛들은 것 아니겠느냐?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정리하는 것이란 무엇이냐? 바로 이 다양한 측면의 구체적인 내용 속에서 각종 사물을 분별하거나 인식하는 원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목적이 달성된다. 원칙을 찾았다면, 진리 원칙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볼 줄 알게 되고, 다른 사람도 자신도 분별할 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았다는 증거다. 네가 이 측면의 진리를 깨닫고 또 운용한다면, 이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자질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자질과 관련된 진리 원칙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을 전반적으로 어떻게 가늠할지, 그 원칙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부적인 측면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무척 많이 교제했고, 그 구체적인 모습들로 사람의 자질이 어떠한지를 가늠했다. 그렇다면 자질이 좋은 사람은 전반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그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마음속에 구체적인 원칙이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거나 아직 진리를 듣지 못한 상황에서도, 그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즉, 처신에 마지노선이 있는 것이다. 이 처신의 마지노선은 어느 정도 진리 원칙에 부합하거나 근접하며, 최소한 인성과 양심, 이성의 기준에 근접한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받아들여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은 후에는 많은 일이나 특별한 환경을 겪지 않았음에도 마음속으로 진리 원칙을 어느 정도 깨닫고 파악할 수 있다. 또 그는 실생활에서도 이런 원칙을 이용해 각종 사람과 일을 다룰 줄 안다. 물론, 그가 각종 사람과 일을 다룰 때는 간단한 한 가지 문제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복잡다단한 사람과 일을 마주할 때도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을 운용해 대하고 다룰 줄 안다. 이것이 자질이 좋은 사람이 원칙과 관련된 문제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그는 자질이 좋기에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 말씀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듯 자질이 좋은 사람은 독립적으로 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고, 각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모습이다. 주로 어떤 모습이 있었느냐? (주로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공급을 통해 하나님 말씀 속에서 스스로 각종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원칙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리하여 독립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진리를 깨닫고, 각종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원칙을 찾아내 독립적으로 사역을 맡을 수 있어야 자질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독립적으로 사역을 맡으려면 각종 능력을 두루 갖춰야 한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 진리 원칙으로 자질이 좋은 사람을 가늠하니,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분명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는 많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자질이 좋든 평범하든,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올바른 처신의 원칙을 지닐 수 없다. 처신의 원칙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의 공급을 받아 진리를 깨달은 것을 기초로, 실제 체험을 통해 점차 처신의 원칙을 알아가야 한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 말씀의 기본적인 뜻과 요구 기준을 이치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막상 일이 닥치면 진리 원칙을 적용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과 공급을 받거나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기본적인 진리 원칙을 몇 가지 깨달을 뿐이다. 여기서 ‘기본적’이란 무슨 뜻이냐? 그가 파악한 원칙들이 기본적으로 단순하고 간단한 편이라서 일반적인 문제는 처리하고 해결할 수 있지만, 복잡한 상황과 배경이 닥치면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반드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야만 복잡한 문제나 여러 가지 업무에 대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어떤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느냐? 그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독립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행 원칙을 찾지 못하며,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한다. 누가 교제하고 붙들어 주며, 살펴보고, 분명하게 알려주고, 일깨워 줘야 비로소 ‘이게 진리 원칙이니까 기억해야겠구나. 이대로 실행하고, 이 사역 지침대로 실천해야겠어.’라고 알게 된다. 이는 이해하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다음으로 사역하는 측면에서 보면, 사역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진리 원칙을 빨리 적용해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리하지 못한다. 그저 기본적인 진리 원칙 파악을 기초로, 단일 사역만 처리할 수 있을 뿐이다. 여러 진리 원칙과 관련된 복잡한 사역이 닥치면 누군가가 살펴주고 붙들어 주며 공급해 줘야 한다. 이것이 자질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개인적인 이해 측면에서 보면 누군가가 교제해 주고 살펴봐 줘야 한다. 또 많이 들어야 하는데, 한 가지 측면의 진리만 들어서는 안 되고 여러 측면의 진리를 들어야 한다. 마지막에 누가 각 측면 진리의 기본 원칙이 무엇인지 알려 줘야 조금이나마 마음으로 깨닫는데, 복잡한 상황이 닥치면 또다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며, 구해야 한다. 이는 이해하는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사역이나 실생활에서 갖가지 일을 처리할 때도 그의 문제 처리 능력은 진리 원칙을 지켜 단순 업무를 처리하는 정도에 그친다. 여러 가지 진리 원칙과 관련된 복잡한 사역을 마주하면 힘에 부쳐서 구해야 하고, 누군가가 살펴봐 줘야 한다. 그 스스로는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없고, 자신이 행한 사역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니 때때로 오류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런 오류는 그저 오류일 뿐, 치우침은 아니다. 만약 치우침이라면 그것은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오류와 치우침은 차이가 있다. 오류란 진리 원칙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고, 부족하거나 전반적인 고려가 이뤄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하지만 방향은 맞다. 다만 사역 경험이 부족하거나 진리를 너무 얕게 깨달아서, 혹은 진리 원칙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합격 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합격 기준에 근접했을 수는 있으나 완전히 합격하려면 더 보충해야 한다. 이것이 자질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런 부류의 주된 특징은 무엇이겠느냐? (독립적으로 어떤 한 사역을 해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도와주고 붙들어 주어야 사역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의 특징은 이해 측면이든 본분 이행 측면이든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기본적으로 혼자서는 어떤 업무도 잘 해내지 못하며, 반드시 누가 붙들어 주고 살펴보고 일깨워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이성은 일할 때 많이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얼른 겸허히 구하거나 하나님 말씀에서 진리 원칙의 근거를 찾거나 윗선에 구해야지, 맹목적으로 얼렁뚱땅 처리해서는 안 된다. 한동안 사역하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면 얼른 정리해서 기록하고 상부에 구해야 한다. 목적은 그 기간 동안 네가 한 사역에 오류나 허점이 있는지 상부에서 살펴보게 하는 것이다. 너무 자기 확신에 차서 스스로 사역 경험이 있다고 여기거나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제를 알아야 한다. 평범한 자질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 (독립적으로 사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붙들어 주고 도와주며 살펴봐 줘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측면에서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측면에서는 기본적인 원칙만 깨달을 수 있을 뿐, 실제 사역에 적용하지 못합니다.) 사역 능력 측면에서의 특징은 무엇이냐? (사역 능력 측면에서 볼 때,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진리 원칙을 빨리 적용해서 각종 문제를 바라보거나 처리하지 못하고, 단일 사역만 유지하는 데 그칩니다. 여러 가지 업무가 관련되면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고, 일의 경중과 완급을 따져서 각 사역을 잘 처리하지 못하며, 합리적인 사역 배치는 더더욱 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누가 방향을 잡아 주고 수시로 도와주며 붙들어 줘야 합니다.) 그렇다.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혼자서 단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사역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는 간단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 특히 여러 가지 진리 원칙이 관련된 사역을 마주하면 머리가 멍해져서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 순간적으로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지만, 다음 순간에는 저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모르고, 일을 마친 후에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도 가늠하지 못하니 이런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다.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단일 사역은 감당할 수 있어도 여러 가지 사역이나 조금 복잡한 사역을 마주하면 머리가 멍해진다. 너희 중 몇몇 리더 일꾼이 한 가지 사역을 맡으면 그럭저럭 감당하지만, 두세 가지 사역을 맡으면 감당하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잘하고 싶어도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역으로 바쁜 와중에 누가 이런저런 문제를 제기하면 머리가 멍해져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니, 결국 어떤 사역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이것이 평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두세 가지 사역을 동시에 감당하지 못하고, 특히 복잡한 상황이나 특수한 상황이 닥치면 바로 머리가 멍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잘하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그가 맡은 사역은 문제가 생기고 지체된다. 그러므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두세 가지 사역을 맡을 수 없으며, 단순한 사역 한 가지만 하는 것이 적합하다. 언제나 사역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리더 일꾼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문제를 제기해도 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의 머리가 이상해서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라고 여긴다. 결국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는데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제야 상부에 보고한다. 이런 리더 일꾼은 경험이 너무 적어서 식견이 없다. 사역을 할 때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거라고만 생각하며, 규례 몇 가지만 지키면서 앞만 보고 달린다.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의식하지 못하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전체 사역에 지장이 생긴다는 것은 더더욱 의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이 인성의 여러 측면에서 모두 합격점에 이른다면, 기본적으로 단일 업무는 감당이 가능하다. 그가 전반적인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는, 그의 자질로는 단일 업무만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 취미와 관심사, 특기와 관련된 사역은 그의 자질로도 감당할 수 있지만, 여러 사역과 관련된 복잡한 상황이 오면 갈피를 못 잡는다. 설령 실제 체험이 있다 해도 그의 자질로는 부족하다. 혹자는 “제가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건가요?”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40~50세가 되어도 여러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는 경험을 쌓고 실제로 체험하면서 단일 사역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3~5할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하고 살펴보거나 체크해 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독립적으로 사역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자질이다. 어떤 이들은 다년간의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경험도 쌓고 진리 원칙도 얼마간 깨달았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여러 사역, 특히 한 분야의 사역을 혼자 맡지는 못한다. 복잡한 상황이 닥치면 머리가 멍해지고, 일의 경중과 완급을 구분하지도 못하니, 이런 사람의 자질은 분명 평범한 것이다. 사역 경험은 한 사람의 업무 능력에서 한 부분을 차지할 뿐,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질이 어떠한지, 각 측면의 능력이 어떠한지가 중요하다. 사역 경험은 단지 참고가 될 뿐이다. 물론 그것도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가치 있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실제 사역 경험으로 여러 사역의 원칙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다. 네가 자질이 좋고 진리 원칙을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업무 경험이 없거나 경력이 그리 많지 않더라도 전체 사역을 독립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며, 한 분야를 혼자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전체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지 못한다. 오직 단일 사역만 완수할 수 있으며, 그나마도 늘 누가 일러 주고 살펴보고 도와주고 지도해 줘야 한다. 그러니 자질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떤 단일 사역을 잘할 수 있다고 해서 여러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한 분야를 혼자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착각이고 잘못된 인식법이다. 네가 단일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는 것과 여러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고 한 분야를 전적으로 맡는 것은 차이가 있다. 천천히 체험해 보면 알 것이다. 어쩌면 이 말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년간 리더 일꾼으로 있으면서 실제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이해가 되지, 보통 형제자매들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여러 사역을 맡아 본 리더 일꾼은 실제 체험이 있어 그 차이를 알지만,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은 이것으로 정리를 마치겠다.
이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을 정리해 보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은 분명 자질이 평범한 사람보다 나쁠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스스로 구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 한 단락 한 단락이 무슨 뜻인지, 하나님의 뜻과 요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지만, 진리 원칙과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즉,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인지, 거기에 어떤 진리 원칙이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 혼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이해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일을 접한 뒤에도 이해하지 못하며, 교제한 뒤에도 여전히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감으로 자신이 지켜야 할 규례가 무엇인지는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규례, 즉 형식적이고 교조적인 가르침이나 규칙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진리 원칙을 교제하면서 이 측면에서 사람의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 순수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치우치게 받아들이는 것 등 여러 가지 모습을 사례로 들었다고 해 보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을 얻었겠느냐?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며, 이것도 먹지 말고 저것도 먹지 말라고, 이런 말도 하지 말고 저런 말도 하지 말며, 그런 단어를 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그것이 바로 진리 원칙이라고, 그런 규례와 가르침, 행동 방식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규례를 지키는 거라고 아무리 말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 규례를 지키려고만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규례를 지키고 싶다면 지켜라. 속셈만 나쁘지 않으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한 번은 “기도할 때는 경건하게 임해야지,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된다. 환경이 갖춰져 있다면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게 가장 좋다. 또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경건함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기도할 때 경건하게 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반드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한 가지 규례만 기억했다. 그는 반드시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진리 원칙으로 삼아 지키며, 그것이 진리 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든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고 했는데, 식사할 때 기도하고 싶으면 식탁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고, 밭에서 일할 때도 땅이 얼마나 더럽든, 흙에 뭐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심지어 이방인들 사이에서 재난이나 뭔가 큰일이 닥쳐 하나님에게 기도하려 할 때도 반드시 공개되지 않은 장소를 찾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 실행이라고, 나아가 자신은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도를 잘 준행하며 누구보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아라. 이것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런 부류는 이해하는 측면에서 부족하고 문제가 있어서 늘 원칙을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규례로 규정한다. 그는 글귀와 지식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이해하려 하고, 또 당연히 글귀와 규례, 가르침과 형식을 지키는 방식으로 진리를 실행하려 한다. 진리 원칙을 아무리 교제해 줘도 그는 들은 후에 그것이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규례, 행동 방식이나 구호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하나의 규칙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진리 실행을 그렇게 간단하게 본다. 어떤 일을 해도 되는지, 어떤 일을 하면 안 되는지만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전부 규례로 가늠하고, 규례로 대한다. 외부 환경과 주위 사람, 일이 어떻게 변하든 그 하나의 규례만 변함없이 고수하는 것이다. 그를 가리켜 진리를 좋아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고 하면, 그는 속으로 억울해하며 말한다. “저는 그토록 많은 것을 버리고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또 그토록 많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실행했지요. 그런데 왜 제가 진리를 좋아하지도, 실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까? 또 왜 제가 규례를 지킨다고 하는 거죠? 저는 억울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이 부류의 주된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의 자질은 어느 부분이 부족하겠느냐?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어떤 측면의 진리를 얼마나 교제하든 결국 그에게는 하나의 행동 방식이자 규칙, 말씀, 형식으로 귀결될 뿐, 하나의 원칙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만약 누가 그의 그 규칙에 어긋나는 말을 하거나 단어를 사용하면, 그는 그것을 진리 원칙을 어겼다고 생각하니 골칫거리가 된다. 그래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각종 규례와 형식, 글귀, 행동 방식으로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고 규정하는 한편, 또 하나의 문젯거리를 갖고 있다. 바로 자신이 늘 말하는 도리와 늘 지키는 규례, 행동 방식으로 다른 사람, 심지어 하나님을 가늠한다는 것이다. 가늠하는 것 외에도, 그들은 늘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보통 찬 것을 잘 먹지 못한다. 위에 부담이 가서 날것이나 찬 것을 거의 먹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당신을 이해했습니다. 앞으로는 당신께 찬 것을 드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언제든 당신이 찬 것을 드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여름에 기온이 높을 때, 농장의 딸기가 익었길래 가서 두어 개를 먹으면,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 ‘당신은 찬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딸기는 찬 음식이잖아요? 전에 찬 것을 먹으면 위가 불편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오늘은 왜 딸기를 드시는 거죠? 그건 거짓말 아닌가요?’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그가 일을 정확하게 보는 것 같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가 정확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를 규례로 삼아 사물을 가늠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배경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다. 보통 날것이나 찬 것을 먹으면 위가 불편해지지만, 특수한 경우도 있다. 가령 일하면서 몸에 열이 나고, 날씨까지 더워서 기온이 30도 정도 되면, 이런 날것, 찬 것도 그렇게 차갑지는 않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먹어도 된다. 절대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보통의 상황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여름철에 더울 때는 조금 먹어도 된다. 그런데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듣는 순간 하나의 규례나 공식으로 여긴다. 특수한 상황이 닥쳐도 이 공식에 맞춰 보고, 맞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은 날것, 찬 것을 먹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지금은 왜 또 드시는 거죠? 이는 거짓말 아닌가요?’라고 말이다. 무엇이 부족하기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그는 이해 능력이 없습니다.) 그는 환경의 변화와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 일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자질이 충분한 사람이라면, 일을 마치면 몸에 열이 나는 데다가 날씨도 더워서 과일이 그리 차갑지 않으니 조금 먹는 것은 문제없다는 것을, 이는 매우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알고 이해하며 납득할 것이다. 하지만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걸려 마음에 관념이 생긴다. 관념이 한번 형성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물론, 이런 작은 일은 무슨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는 시종일관 마음속으로 내려놓지 못한다. ‘그것은 거짓말 아닌가요? 이제 보니 당신도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보아라.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도 쉽게 규정하고 판단한다. 큰일과 관련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관념이 생긴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사소한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전혀 분별하지 못하며, 무슨 일을 보든 죽어라 규례에만 맞춘다. 그는 규례를 지켜야 진리가 있는 거라고 여기면서, 네 언행이 아무리 진리 원칙에 부합해도 자기 관념과 상상에 맞지 않고 자기가 인지한 규례와 상충되는 한, 마음속으로 너를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다.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네게 관념이나 편견을 품을 것이다. 이렇듯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듣고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전부 하나의 가르침이나 행동 방식, 규례로 귀결시키고, 그런 가르침과 행동 방식, 규례를 지키면서 매우 즐거워하며,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때로는 스스로 감동하여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세상에 자신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그가 지키는 것은 하나의 규례이자 행동 방식일 뿐인데, 그는 이렇게 실행하면서 계속 지키고 변치 않으며 자신이 진리를 얻었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고 여긴다. 이는 문제 아니겠느냐? (문제입니다.)
너희는 규례를 고집하는 것을 자주 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밥하는 사람에게 이제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으니 매일 시원한 차와 음료를 준비하고, 식사할 때는 찬 음식, 즉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샐러드를 곁들이면 입맛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해 보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날씨가 더울 때 찬 음식과 차가운 음료를 먹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아주 잘 지킨다. 하지만 어느 날 기온이 떨어졌는데도 그는 날씨가 춥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지금은 여름이니까 찬 음식과 음료를 준비해야지. 매일 실컷 먹어서 속까지 시원하게 해 줄 거야. 기온이 떨어지든 말든 상관없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찬 반찬을 준비하는 것으로 모자라 국수도 찬물에 헹구고, 식사 후에는 찬 음료에 얼음까지 띄워서 내어 온다. 어떤 사람이 이를 보고 “어째 오늘 같이 추운 날에도 찬 음식을 준비한 겁니까? 게다가 차가운 음료에 얼음까지 띄우다니, 나보고 얼어 죽으라는 겁니까?”라고 하면 그는 상처를 받는다. ‘내 심보가 그렇게 못됐나? 날씨도 더운데 다들 더위도 좀 식히고 더 많이 먹으라고 이렇게 한 거잖아. 이게 다 원칙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지? 나 때문에 얼어 죽겠다니, 내가 그렇게 비도덕한가? 내 인성이 그렇게 형편없나? 정말 사람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그의 그런 행동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겠느냐? 여기에서의 원칙은 무엇이냐? 계절과 기온에 맞춰 식단을 조절하는 것이다. 여름철에 더울 때는 시원해서 잘 넘어가는 음식이나 음료를 섭취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느냐? 이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으니, 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겠느냐?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으니 전처럼 찬 음식이나 샐러드를 만들지 말고 날씨에 맞춰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규례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 여름이라도 간혹 기온이 떨어지면 ‘여름철에는 반드시 찬 음식과 음료를 준비해야 한다’는 행동 방식이나 규례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 음식도 즉시 바꿔서 찬 음식과 음료는 준비하지 말고 얼음은 더더욱 넣지 말아야 한다. 따뜻한 요리와 국수를 준비하는 등 날씨와 기온에 맞춰 식단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원칙이다. 그런데 그는 날씨와 기온을 고려하지 않고 여름에는 무조건 찬 음료와 반찬을 준비하는 행동 방식을 고수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규례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는 규례를 고집하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일을 처리할 때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인다. 즉, 한마디 말을 기억하면 그것을 규례로 여겨 고집하며, 환경과 사람, 일이 어떻게 변하든 융통성 있게 원칙을 적용해 처리하지 못한다. 사실, 음식에 관한 원칙을 제정하는 목적은 그 음식을 먹고 몸이 편안해지게 하는 데 있으며, 이런 원칙은 규례가 아니다. 그런데 규례를 고집하는 사람은 날씨나 기온이 어떻든, 먹을 때 편하든 불편하든 신경 쓰지 않고 여름이면 무조건 찬 반찬과 음료를 고집하니, 이를 가리켜 규례를 고집한다고 한다.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모든 일이 행해지는 것이지만, 규례를 지키는 것은 결과가 어떻든 형식과 방법만 중시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문제를 처리할 때 이런 행동 방식을 취하고, 어떤 일을 마주하든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일을 마주하든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그의 이해는 얼마간 치우치며,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가 규례나 행동 방식, 의식을 고수하는 것은 진리 원칙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기에, 치우친 것들이 많이 생겨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무슨 일을 이해하든 치우치는 성질을 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하고 쉬운 일에서는 순종하고 따르며 치우치지 않을지 몰라도, 원칙적인 일이나 비교적 복잡한 일에서는 진리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규례만 고집할 뿐이다. 알아들었느냐? (네, 그렇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전혀 없어서 규례만 고집하는데, 이런 부류도 골칫거리가 된다. 그는 규례를 꽤 열심히, 단호하게 지킨다. 네가 그와 교제하면서 “당신은 지금 규례를 지키는 것이지,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각한다. ‘나는 원칙을 굳게 지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과 타협할 수 없는 거라고! 다른 사람은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정죄받는다지만, 나는 원칙을 지켰는데도 정죄받다니, 이건 불공평해!’ 그의 완고한 모습을 보면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너희도 이런 부류를 만난 적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몇몇 사람에게 “춤을 배우고 싶다면 사역이 바쁘지 않을 때 매일 틈을 내서 두 시간씩 연습해라. 한동안 꾸준히 하다 보면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는 ‘매일 두 시간씩 연습을 계속하라’는 말만 기억한다. 그러고는 매일 두 시간씩 연습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후로는 본분이 아무리 바빠도 매일 두 시간씩 춤 연습을 고수한다. 최근 교회 사역이 바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느라 하루에 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그는 계속 두 시간씩 춤 연습을 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면 교회 사역에 지장이 생긴다고 일러 주어도 그는 듣지 않고 “두 시간씩 춤 연습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분부하신 일이니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죠.”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싫어하고, 사역이나 환경의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리하고 적용할 줄도 모른다. 그는 왜 두 시간씩 연습해야 하는지, 두 시간씩 연습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로 인해 얻으려는 성과가 무엇인지 등을 전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 실행은 한마디 말, 하나의 규례, 한 가지 형식을 지키는 것으로 끝이며, 그것이 곧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성과를 냈든 내지 못했든, 그 성과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한 길만 고집하는데, 소 열 마리로도 되돌릴 수 없다. 치우치게 실행하고 있어도 계속 그렇게 하려고 하며, 잘못되었다고 알려주어도 계속 그렇게 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골칫거리 아니겠느냐? 누가 교제해 주든 소용이 없는데, 네가 간신히 알아듣게 얘기하면, 오늘은 그 일을 이해해도 내일은 또 다른 일에서 규례를 고집하고, 한번 고집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네가 늘 바로잡아 줘야 하는데, 그는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치우치고, 이 일 아니면 저 일에서 치우치는 등 끝도 없이 치우친다. 지켜보고 있으면 화가 날 정도지만 도무지 바로잡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자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시비, 옳고 그름, 진리와 규례를 영원히 분별하지 못한다. 구분하는 기준도, 구분할 능력도 없고, 구분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규례적인 일이나 육체노동, 진리 원칙에 관련되지 않은 단일 사역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 기계적으로 몇 시 몇 분에 무엇을 하고 몇 시 몇 분에 또 무엇을 하는 식이다. 즉 시간과 형식, 방법만 지키면 되는 간단한 사역만 할 수 있을 뿐, 좀더 복잡한 일은 하지 못하며, 진리 원칙에 따라 어떤 성과를 내야 한다고 요구하면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그에게 어떤 일을 맡기면서 진리 원칙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해서 각종 문제를 상황에 맞게 처리하고,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라고 하면, 그는 머리가 멍해져서 하지 못하고, 반드시 누가 도와주고 짚어 주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니 그가 혼자 사역을 잘 해내기를 바라지 마라. 그럼 이런 부류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는 매일 정해진 대로 본분 이행을 지속할 수는 있지만, 돌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본분 이행을 중단해 버린다. 따라서 이런 부류에게는 수시로 물어보고 사역을 검사해야 한다. “최근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처리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가 있었나요?” 하고 물어보면,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최근에는 다 좋았습니다. 모두가 본분을 이행하고 정상적으로 예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지요.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사람도 없었고, 누가 궤변을 유포해 사람들을 미혹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는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무엇을 보고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문제를 제기할 줄도 모른다. 그러니 현실 생활에서나 본분 이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가 스스로 처리하고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본인이 처리하지 못할 때는 상부에 구하고 질문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그는 이런 것들을 전혀 할 수 없다. 자질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류가 상부에 문제를 보고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일반적인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머리가 달렸고, 머리에 두 눈과 두 귀도 달려서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말할 줄도 알지만,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 바로 자질이 없고, 문제를 발견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똑똑한 것 같아도 소용이 없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머리에 집어넣은 다음, 그것이 문제인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사고하거나 판별하지 못한다. 또 진리 원칙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해도 상부에 보고할 줄 모른다. 이런 것들을 하나도 할 수가 없다.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그동안 사역에는 문제가 없었나요? 원칙을 깨닫지 못한 부분은 없었나요?” 하고 물으면, 그는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다들 바쁘게 지내고 있고, 다들 잘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훌륭하다. 리더 일꾼으로서, 네가 만약 ‘잘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의 말을 믿는다면 너무나 어리석다. 너는 그와 마찬가지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문제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으며, 문제에 맞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얘기하다 보면 문제를 찾아 낸다. 네가 문제를 발견한 후 어떻게 처리할지 물으면 그는 “무슨 문제요? 저는 발견하지 못했는데요?”라고 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사역하면서 문제를 파악하고 발견하는 데 능숙해야 하고, 문제를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런 다음 처리하고 해결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너는 그와 대화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즉 상담하고 물어보는 등 대화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가 무의식 중에 문제점을 말하게 되는데, 이렇게 대화하지 않으면 그런 문제들을 발견할 수 없다. 네가 이렇게 대화하면 그는 깨우침을 얻고 문득 이런 문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런 방식으로 알아내지 않으면, 그는 사실 이런 일들을 봐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를 얘기할 때는 치약 짜듯 조금씩 조금씩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어야 그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인다. 문제가 있어도 발견하지 못하니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해결하지도 못한다. 말해 보아라.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규례를 지킨다고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 잘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네가 그에게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면 그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자질이 아주 훌륭해. 하나님이 어떤 일에 대해 말씀하시면 나는 듣자마자 바로 행동 방식과 규례를 세우고, 그걸 평생토록 지킨다고. 그러니 자질이 좋은 것 아니겠어? 당신들은 모두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 여름에는 더워서 시원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하면, 나는 계속 찬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면서 그걸 잘 지킬 수 있어. 당신들은 지키지도 못하면서 늘 원칙만 내세우는데, 원칙이 곧 규례 아냐? 그 규례만 지키면 원칙을 지키는 것 아니냐고.’ 그는 오히려 자신의 자질이 좋다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고 긴 설교 중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하나의 가르침, 행동 방식, 규례, 나아가 말 한마디, 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골칫거리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이 꽤 많은데, 네가 진리의 각 세부 사항을 교제하면 그는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성가시게시리! 말을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군. 그런 말을 하지 말고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거잖아? 그 말만 지키면 그만인데, 한마디면 될 일을 왜 저리 번거롭게 얘기하지? 내적 상태에 따라 나누고, 환경에 따라 나누고, 각 부류의 인성에 따라 나누고, 이해가 치우쳤느니 올바르니 하면서 구분하고 있잖아. 그렇게 세세하게 나눌 필요가 있나? 그렇게 따질 필요가 있냐고. 정말 쓸데없는 짓이야!’ 그는 도리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 이것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고, 어떤 측면의 진리 원칙이든 전부 규례나 공식으로 삼은 후 흔쾌히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도리를 말할 줄 알기에 자신이 진리 원칙을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네가 리더 일꾼에게 사역의 원칙들을 알려주면서 이 원칙들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사역하고 각종 문제를 처리하라고 하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절대 그것을 적용하지 못한다. 그는 이러한 진리 원칙들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들을 사역에 적용하지도 못한다. 아래에서 사역할 때는 전부 규례를 지키고 형식을 따르며 맹목적으로 이론을 답습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 원칙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자질이 부족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 어떤 사역을 하든 문제가 닥치면 속수무책이 되거나 심지어 진땀을 빼며 어떤 사역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상부에서 원칙을 교제할 때는 다 알아듣고, 깨닫고, 이해하고, 기억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생활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머리가 멍해진다. 자신이 깨달은 도리와 규례는 쓸모가 없고, “이걸 어쩌지?”라며 어디서부터 사역을 시작해야 할지, 사역에 어떤 방식을 적용해야 할지, 사역 지침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지 모르며, 더구나 교회 사역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당장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모른다. 결국 아무리 오래 사역을 해도 전혀 성과가 없고, 사역 지침은 이행되지 않으며, 어떻게 해야 교회 생활을 잘할 수 있는냐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가장 기본적인 사역도 이행하지 못하며,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는 사람들에게 도리를 말하고 규례를 지키라고만 할 뿐, 막상 사역 지침을 이행하고 구체적으로 교회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머리가 멍해지고 해내지 못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사역 지침들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지? 어떤 규례들을 지켜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최후의 한 수가 있으니, 예배를 많이 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역할 때 무턱대고 예배하고 설교만 한다. 모두가 들떠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 문제가 다 해결되어 더 이상은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의욕만 있으면 이 사역은 완전히 수행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며칠 동안 예배를 해도 실제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본분 이행은 여전히 성과가 없으며, 교회 사역 또한 어떤 진전도 없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설교할 기분이 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사역을 해도 성과가 나지 않고, 시간을 아무리 주어도 사역 지침을 이행하지 못한다. 효율도 없고 성과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자질이 없는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려주고 진리를 많이 교제해 주어도 그는 진리 원칙은 물론이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례도 파악하지 못한다. 자질이 이 정도로 부족하면 진리 원칙에 이르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실행의 길을 찾지 못하며, 반드시 누가 구체적으로 지적해 줘야만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인두겁을 쓴 짐승 같아서 머릿속이 늘 몽롱하고, 무엇이 원칙이고 무엇이 규례인지 구분하지 못하며, 속으로 ‘왜 이런 것들을 들으면 머리가 아프고 졸리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나는 진리 원칙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규례조차 지키지 못해. 앞으로는 의욕이 생기는 만큼만 하고, 능력 되는 만큼만 힘을 쓰자. 뭔가를 좀 할 수 있으면 아무렇게나 좀 하면 되지.’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는 규례도 지킬 줄 모르고 진리 원칙도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생각한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자질이 이렇게 부족하면 진리조차 깨닫지 못하는데,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자질이 없는 사람은 각 측면의 이해 능력이 전혀 없어서 규례를 지키는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 중 일부는 그래도 진리를 실행할 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원칙이나 규례, 공식을 파악하고 진리를 조금이라도 실행해 내지만, 자질이 없는 사람은 규례적인 것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다. 이는 더 가련한 부류이다.
자질의 각 측면 문제를 진리 원칙으로 가늠하면 방금 교제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가늠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자질이 좋은 사람은 분명 영적인 이해력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소위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원칙을 파악할 수 있으며, 진리를 적용하여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과 관련된 각 측면의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적용하여 하나님 집 내부의 각종 문제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각종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겠느냐?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다양한 일을 처리할 능력을 갖추었기에, 외부의 일도 비교적 인성적이거나 긍정적인 사물에 가까운 원칙을 적용하여 처리할 것이다. 각종 사물이 아무리 변해도 그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며, 그 안의 원칙은 자질이 좋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에, 자질이 좋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는 것은 영계와 통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종 사물의 원리와 원칙에 통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직설적이고 간단한 통속적 설명이다. 외부 사물의 원리나 진리와 관련된 원칙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가늠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하며, 일부는 이해하고 일부는 이해하지 못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부분은 그의 자질이 도달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하나님을 믿는 각 측면의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고,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아도 그 안에서 파악해야 할 원칙을 모색할 수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부분은 자질이 도달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지도하고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원칙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양육과 지도, 지적이 있어야만 어떻게 사역하고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측면의 모습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는 그 수준이 낮아서 반만 이해하는 것과 같다. 어떤 수준이 낮겠느냐? 진리 원칙을 파악하는 수준이 낮아서 각 항목의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지 못한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가늠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가늠하기 쉽지 않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규례만 지키기 때문이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사실 사람의 영이 없다. 사람의 영이 없으면 짐승처럼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니, 이런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가늠할 필요가 없다. 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을 보든, 어떤 사람을 대하든 가늠할 줄 모르며,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관한 관점도 전혀 없다. 그저 자기 이익을 지키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옹졸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네가 어떤 관점을 말했을 때, 그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즉 네가 자질이 좋으며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너의 관점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너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너를 무시할 것이고, 네가 제시한 관점이 아무리 올바르고 진리 원칙에 부합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 옳은 것이자 사람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 좋은 관점이 그에게 얼마나 큰 유익과 도움이 되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를 것이다. 반면, 부정적인 인물이 부정적인 관점을 제시했을 때, 만약 그 부정적인 인물이 큰 세력을 지녔으며 그가 인정하고 숭배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그 부정적인 관점을 받아들일 경우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자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질이 없다는 것은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마주하든 밝히 알지 못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원칙도 갖고 있지 않은 이 부류는 나쁜 사람이나 악인을 따를 경우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고, 좋은 사람을 따를 경우 좋은 일을 좀 할 수 있다. 이들은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기에,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질이 나쁜 사람도 자질이 좋은 사람이나 긍정적인 인물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좋은 것들을 배울 수 있고, 좋은 규례와 긍정적인 말, 행동, 또는 긍정적인 사상 관점을 지킬 수도 있다. 하지만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은 긍정적인 사상 관점, 좋은 행동과 규례, 좋은 생각이나 긍정적인 생활 방식, 생활 상식조차 배우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니, 혼자 살게 되면 그 우둔한 자의 생활 실태가 완전히 드러난다.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인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최소한 자질이 평범하다. 만약 진리에 이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런 자는 자질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분명 자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두 부류로, 이 두 부류는 틀림없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 자질이 좋은 사람만이 100%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도 보통이다. 즉, 많은 일에서 자질이 부족하여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그저 일반적인 일에 대해서만 영적인 이해력을 보이고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뿐, 복잡한 일이나 여러 가지 사역이 닥치면 기준에 못 미쳐서, 혹은 그 안에 담긴 진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해서 독립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의 영적인 이해력은 매우 평범하다. 자질이 부족한 부류의 특징은 진리 원칙에 미치지 못하고 규례만 지킨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다가 진리 원칙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진리 원칙이 곧 규례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 부류는 확실히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이 부류의 큰 특징은 바로 각종 사람과 일을 이해할 때 드러내는 사상과 관념이 모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 치우침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정상 인성의 사고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정상 인성의 필요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바로 치우침이다. 그가 말할 때의 사고 논리를 들으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가 어떤 관점이나 어떤 일에 대해 말하는 걸 들을 때마다 매번 의아해진다. 의아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들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속으로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째서 정상인과 다르게 생각할까? 저런 생각은 너무 이상하잖아. 왜 약간 허황되게 느껴지지?’라고 생각하게 되며, 마음이 아주 불편해지고 터무니없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말할 때마다 듣는 이를 의아하게 하는 사람은 치우친 사람, 그것도 몹시 치우친 사람이다. 예를 들어, 네가 그에게 “식사하셨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오늘 꽤 춥네요.”라고 대답한다. 이 두 문장이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오늘은 왜 이렇게 얇게 입으셨어요?”라고 하면 그는 “저는 오늘 생강차를 한 잔 마셨답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네 질문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느냐? 그의 대답에 정상적인 사고 논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고 논리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실내가 따뜻한 데다가 밖에 햇살도 좋고 기온이 높은 편이길래 옷을 얇게 있었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방금 운동을 했거든요. 몸에 열이 나서 옷을 적게 입었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누가 “왜 그렇게 옷을 얇게 입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가 “오늘 방한화를 신어서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대답은 질문과 아무 관계가 없다. 즉, 그의 그 생각과 논리는 정상 인성의 사고와 논리에 맞지 않고, 정상 인성의 사고를 지닌 어떤 사람도 생각해 내지 못할 아주 이상한 말이자 생각이다. 그래서 듣고 나면 불편해지는 것이다. 대화하려고 해도 그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늘 동문서답을 하니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옷 만들기를 배우고 있길래 내가 “옷 만들기는 얼마나 배웠느냐? 패딩도 만들 줄 아느냐?”라고 물었다. 정상적인 사고 논리에 맞는 대답은 무엇이겠느냐? (만들 줄 안다거나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고 논리다. 또는 “가끔은 잘 만들어서 선생님이 그 정도면 괜찮다고, 그럭저럭 합격이라고 하시는데, 복잡한 부분은 불합격이라 다시 손봐야 합니다.”라고 말해도 된다.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사고 논리를 가진 사람의 대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고 논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내가 “이제 이런 패딩을 만들 줄 아느냐?”라고 물으면 그는 “저는 처음부터 이런 옷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럼 이제 만들 수 있느냐?”라고 하면 그는 여전히 “저는 처음부터 이런 옷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못 알아듣겠다. 처음부터 그런 옷 만드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 만들 줄 아는 것이냐? 왜 나는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 것이냐?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불편해졌다. 그런 옷을 만들 줄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옷 만들기를 배웠다고 하니, 어떻게 그 주제로 넘어간 건지, 그것이 옷을 만들 줄 아는지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두세 번이나 “그래서, 이제는 만들 줄 아는 것이냐?”라고 물었는데도 그는 계속 “저는 처음부터 그걸 배웠습니다. 선생님도 그걸 가르쳐 주셨고, 주로 그걸 만들죠.”라고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답은 여전히 듣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가 도대체 만들 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그 말에 어떤 논리가 있는지, 그가 왜 그렇게 말한 것인지 너희가 분석해 보아라. (그의 대답은 질문과 좀 동떨어진 것이어서, 듣는 사람이 그의 의도를 짐작은 할지언정 실제로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알려주고 싶은 것이겠느냐, 아니면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겠느냐? 그가 네게 정확한 답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겠느냐? 여기서 그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처음 왔을 때 주로 이런 걸 배웠습니다. 이제 일주일이나 됐으니 당연히 할 줄 알겠죠. 제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못 알아듣는 거죠?”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의 대답에서 이런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느냐? (파악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의 대답을 통해 정확한 답을 알 수 있어서 그가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파악이 된다면 그의 말은 논리에 맞겠지만, 그의 말은 그저 모호한 의미만 전달할 뿐, 그가 실제로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런 말만 하는 사람은 무척 어리석지 않으냐? 만약 그가 의식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면 그것은 인품의 문제이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거라면 그의 대답은 네가 알고자 하는 답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으니, 이는 그의 사고와 논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사고와 논리에 문제가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질이 떨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치우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우침의 한 가지 모습이다. 그는 ‘내가 처음 왔을 때 이걸 배웠다고 말했으니, 필연적으로 내가 할 줄 안다는 결과가 나와야지.’라고 생각한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할 줄 안다’는 답이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도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처음 왔을 때 이걸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과 할 줄 알게 되었다고 알려주려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관계가 없다. 그러니 그의 대답은 헛소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헛소리를 하면서도 자기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이미 질문에 답을 했다고 여기는 것은 자질이 떨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떨어지는 한 가지 모습이다. 그는 정상 인성의 사고와 논리가 없어서, 어떻게 물어도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왜 계속 그 질문을 하는지를 의식하지 못한 채 세 번을 물어도 여전히 같은 대답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짜증을 낸다. ‘왜 끝도 없이 자꾸 물어보는 거야? 진작에 말해 줬는데도 못 알아듣고 또 물어보네!’ 세 번이나 연속으로 물어봤는데도 자기 대답이 명확하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답이 아니므로 상대가 추측하지 않도록 말하는 방식을 바꿔 자기가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명확히 말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또 그는 자신이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상대가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의식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질이 없는 것이다. 몇 번을 물어도 그는 똑같이 대답하면서 자신이 한 말은 다 진심이고 거짓이 없다며 ‘한 가지 일에 대해 몇 번을 물어봐도 한결같이 대답하고 있으니, 나는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실천하고 있는 거야.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질이 떨어지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장 씨의 일을 물어보면 그는 계속 이 씨의 일에 대해 말하고, 이 씨의 일을 물어보면 계속 장 씨의 일에 대해 말하니,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그는 마음이 맑지 않고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이는 자질이 떨어지는 주된 모습이다. 요컨대, 각기 다른 자질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은 이러하다. 진리 원칙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지로 가늠하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로 가늠하든 이런 모습들이 나타난다. 비록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맞아떨어지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질에 대해서는 대략 정리가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자질과 관련된 주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말해 보아라.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정도가 자질의 좋고 나쁨과 관계가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것이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겠느냐? 너희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이것은 문제 아니겠느냐?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희는 자질이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좋지 않은 자질을 주셨기 때문에 저희가 심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전에 교제한 선천적 조건과 인성, 그리고 패괴 성품의 차이에 근거할 때, 자질은 무엇으로 분류해야 하느냐? (선천적 조건으로 분류해야 합니다.) 선천적 조건으로 분류해야 한다. 그렇다면 너는 선천적 조건의 다양한 측면이 사람의 인성이나 패괴 성품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아느냐? 먼저 자질에 대해 말해 보자.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정도를 자질이 결정하느냐? (결정하지 않습니다.) 왜 결정하지 않는다고 하느냐?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 자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패괴 성품 때문입니다.) 맞다. 그것이 실상에 부합한다.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며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자질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너에게 좋지 않은 자질을 주었다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자질이나 다른 여러 측면의 선천적 조건 자체는 사람 자신의 조건 중 하나로, 너라는 피조물이 갖춘 고유한 선천적 조건이다. 어떤 측면의 선천적 조건이든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며, 패괴 성품과도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키가 큰 것이 패괴 성품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예쁘고 피부가 하얀 것이 패괴 성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앙망하는 인종으로 태어난 것이 패괴 성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측면의 선천적 조건을 주었든, 사람의 선천적 조건이 어떻든 전부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의 용모 자체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지만,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어서 외모가 훌륭하면 ‘나는 아름다우니까 지위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존중받아야 해.’라고 생각한다. 이런 표출은 패괴 성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잘난 용모라는 조건을 이용해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는데, 그러면서 잘못된 언행을 숱하게 드러낸다. 이런 언행은 모두 패괴 성품으로 인한 것이지, 선천적 조건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자질이 좋든 나쁘든 자질 자체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 자질이 좋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할 것이다. 반면, 자질이 좋지 않더라도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알아듣고 지킬 수 있으며, 패괴 성품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꾀부리거나 건성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제멋대로 굴면서 멋대로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질이 좋든 나쁘든, 패괴 성품이 있는 한,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어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삼았기에, 내면에 갖가지 사탄의 사상 관점과 처세 철학, 사람과 일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또 자신을 드러내고 지키려 하며, 항상 두각을 나타내고 남들 위에 서려고 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 이런 모습은 모두 사람의 사탄 본성에서 비롯된다. 사탄의 본성, 사탄의 생명에 기대 여러 일을 하면, 자질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다. 자질 자체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 자질이 좋지 않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으면 그 말씀대로 행하면 된다. 그럴 수 있겠느냐? 패괴 성품이 없거나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사람은 늘 ‘내게는 이런 특기가 있으니 나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하나님 집에서 지위를 갖고 리더가 되거나 하나님 집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고.’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특기 때문이 아니라 패괴 성품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사람이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드러내고 살아내는 것, 표현하는 것, 각종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입장과 원칙이 전부 그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준 어떤 선천적 조건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교제하는 의미가 무엇이겠느냐? 이런 말씀을 교제하는 목적은 너희가 자신의 실제 상황을 더욱 분명히 알고 인식하며 자신의 자질이 어떠한지 인식하여 이성이 없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자질이 평범하고 부족하다고 쓸데없이 발버둥치거나, 심지어 자질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쓸데없이 변명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전혀 가치가 없다. 또한, 이런 것들을 교제하는 것은 네가 자신의 자질과 각 측면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해 자기 위치를 찾고 착실히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네가 피조물의 역할을 다하고 피조물의 분수를 지키고,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데 더 도움이 되며, 당연히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네 자질이나 각 측면의 능력이 어느 수준에 있든 그것은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정도를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네 패괴 성품은 네 자질의 등급에 달려 있지 않고, 더욱이 네 선천적 조건에 달려 있지도 않다. 사람의 패괴 성품은 사람의 선천적이고 고유한 육체 안에서 생겨난 것으로,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후 패괴 성품은 사람 안의 생명이 되었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전까지, 너는 사탄의 생명으로 네 선천적 조건을 이용해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는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전까지 너는 하나님이 네게 준 각 측면의 선천적 조건을 이용해 네 목적을 달성하는 데 힘쓰게 된다는 뜻이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이 네게 준 각 측면의 선천적 조건을 이용하거나 짓밟는 것이다. 반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여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과정에 있다면, 하나님이 네게 준 각 측면의 선천적 조건을 정당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패괴 성품을 생명으로 삼는 것에서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것으로 변한다면, 너는 하나님이 네게 준 선천적 조건을 정당하고 정확하게, 또는 더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제 이해했느냐? 선천적 조건 자체는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이 아니다. 사람의 사탄 패괴 성품, 사탄이 사람 안에 심어 놓은 생명이야말로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원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제 이 문제가 대체로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느냐? (명확하게 이해됐습니다.)
자질이라는 주제에 대해 교제하기 전에, 선천적 조건, 인성, 그리고 패괴 성품이라는 세 가지 측면의 여러 모습에 대해 교제하였다. 지난번에 교제한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느냐? (지난번에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일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 일을 용두사미로 하는 것, 일을 신중하게 하는 것, 허풍을 떨고 큰소리치는 것, 부주의한 것,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것, 가난한 자를 싫어하고 부자를 좋아하는 것, 권력에 아부하는 것,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것 등 몇 가지 측면에 대해 교제했습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교제하지 않고, 이어서 선천적 조건, 인성, 그리고 패괴 성품의 표출과 관련된 여러 측면의 모습에 대해 교제하겠다. 그러한 모습이 있을 때 그것이 어떤 측면의 문제인지 알아야 하며, 구별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다. 만약 선천적 조건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바꿀 수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만약 인성의 결함이나 흠에 속하며, 극복하거나 교정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교정하고 변화시키도록 노력해라. 극복할 필요가 없고 본분 이행이나 진리 추구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선천적 조건이나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패괴 성품과 관련된 것이라면, 반드시 변화시켜야 한다. 만약 변화시키지 않고 벗어버리지도 않는다면, 패괴 성품이 주도하는 일종의 ‘생명’이 네 내면에 뿌리내릴 것이다. 또한, 네가 살아내고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남들 눈에 거슬리고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이는 것과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진리 원칙에 위배되며, 하나님을 거스르고 저버리고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과 관련되며, 심지어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은 바로 이런 성질을 지니므로, 이런 모습들이 패괴 성품과 관련되는 한 반드시 해당 측면의 패괴 성품을 인식한 후 진리를 구하고, 진리 실행의 원칙을 명확히 파악하여, 진리 원칙대로 실행함으로써 해당 측면의 패괴 성품을 대체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측면의 패괴 성품이 더 이상 네 생명을 주도하지 않게 해야 하고, 대신 진리가 생명이 되어 네 생활과 네가 살아내는 것들을 주도하게 해야 한다.
계속해서 선천적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각 측면 모습을 교제하겠다. 지난번에 교제한 마지막 모습은 기억력이 좋은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어느 측면에 속하겠느냐? (선천적 조건에 속합니다.) 그것은 선천적 조건이자 인성 한 측면의 결함이다. 이 두 가지 측면에 속한다. 그렇다면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패괴 성품이겠느냐?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또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뇌가 노화되어 기억력이 나빠졌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린다.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선천적 조건이고, 후천적인 것이라면 인성의 결함이다. 선천적으로 금방 잊어버리는 것도 당연히 일종의 결함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계획적으로 일하는 것은 어떤 측면이겠느냐? (인성의 장점입니다.) 그것은 인성의 장점이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계획을 세우고, 그다음에는 단계별로 실행하며, 충동적이거나 경솔하거나 무모하게 굴지 않는다.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며, 감정에 휩쓸려 판단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움직이기 전에 먼저 어떻게 갈지, 누구와 갈지,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지, 어떤 증명서와 물건들을 가져가야 할지, 또는 그 지역 환경에 맞춰 필수적인 생활용품을 챙길 필요는 없는지 등을 고려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모두 고려할 수 있다. 그는 일을 하기 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며, 더 다양한 일들을 세밀하게 고려한다. 사전에 유리한 조건과 불리한 조건의 차이를 미리 헤아려 보고, 최선의 상황과 최악의 결과가 어떨지도 구분해 두며,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합리적인 조치를 취한다. 그는 계획적인 데다가 합리적으로 배치하기에, 일을 처리할 때 보통 상대적으로 더 철저하다. 그가 배치한 일과 일정에서는 돌발 상황이 덜 발생하고, 후속 효과도 더 좋다. 그래서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하지 않고 안정된다. 그렇다면, 계획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인성의 장점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 계획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계산적인 것은 좋은 것이냐?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인성의 결함입니다.) 계획적인 것은 인성의 장점이자 우수한 점이고 긍정적인 것이지만, 계산적인 것은 인성의 결함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해서 총 10위안이 나왔는데, 계산할 때 한 사람은 5.5위안을 내고 다른 한 사람은 4.5위안을 냈다고 해 보자. 그는 ‘이건 적절하지 않아. 저 사람은 0.5위안을 덜 냈잖아. 똑같이 5위안씩 내야 공평하고 합리적이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잘한 금액까지 계산하고, 손해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서 늘 틈만 나면 만회할 궁리를 하는데, 만회하지 못하면 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잘 못 잔다. 계산적인 것은 인성의 결함으로, 이것이 심각해지면 큰일에서도 계산적으로 굴고, 늘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취하거나 잇속을 차리려 하며, 이익을 위해 수시로 계략을 부린다. 이는 단순히 인성의 결함이 아니라 패괴 성품과 관련된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도, 타인의 이익을 해치지도 않고, 단지 일상생활 속 사소한 일에서만 계산적으로 굴어서 결국 늘 일을 완수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인성의 결함이다.
소심함은 어떤 문제겠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어떤 모습들이 소심함에 속하겠느냐? 예를 들어, 차를 몰고 외출하려는데 누가 “마침 가는 길이 같으니 좀 태워 주세요. 5분이면 제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차비도 드릴게요.”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차를 얻어 타고 나서 돈을 안 줄까 봐 핑계를 대며 태워주지 않는 것이 바로 소심함이다. 또 어떤 사람은 누가 물건을 빌리려고 하면 빌려주고 싶지 않아서 “제가 지금 쓰고 있어서 빌려 드리기가 힘드네요. 다른 사람에게 빌려 보세요.”라고 한다. 그는 매우 인색하고 각박하며, 사람들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다. 또 남이 자신의 이익을 점할까 봐 몹시 두려워하면서 항상 남의 이익을 점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소심함이다. 또 어떤 사람은 네가 그에게 10위안을 빌려 한 끼 식사를 하고 뭔가를 사려고 하면, 고민하다가 “밥값 5위안만 빌려 드리겠습니다. 1위안도 더는 안 됩니다!”라고 하고, 이튿날 만나서는 또 “그때 식사는 잘 했나요? 5위안은 다 썼어요?”라며 “빨리 갚으세요! 저한테 한 끼 식사값을 빚졌잖아요. 돈으로 갚지 않겠다면 밥을 사든가요!”라고 암시한다. 이런 부류는 사람됨이 지나치게 따지기를 좋아하고 계산에 밝다. 그는 물질적인 면에서만 계산에 밝은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계산적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 의도를 파헤치고 상대방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고민해, 그 말이 자신에게 해가 되거나 자신의 이익을 해칠 경우 즉시 반격한다. 그는 말할 때도 절대 손해 보지 않고 이익을 점하려 한다. 이는 단순히 속이 좁고 소심한 게 아니라 패괴 성품이다. 일상생활 속 물질적, 금전적 교류에서 늘 손해 보지 않고 이익을 점하려 하는 것은 인성의 결함일 뿐, 패괴 성품의 수준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관련된다면, 그것은 인성의 결함이 아니라 패괴 성품의 수준에 미친다. 그렇다면 아량이 큰 것은 어디에 속하겠느냐? (인성의 장점에 속합니다.) 그 또한 인성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할 때 이해득실을 크게 따지지 않고, 남이 자신의 이익을 조금 점하거나 무언가를 가져가거나 때로는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너무 따지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비교적 아량이 넓고 관용을 베푸는 것은 인성의 장점이다.
속이 좁은 것은 어떤 측면의 문제겠느냐? (인성의 결함입니다.) 그건 인성의 결함이다. 속이 좁은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사소한 것까지 따지기를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누가 “당신은 대식가군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이 먹네요.”라고 하면 “제가 식충이라는 거군요!”라며 성을 낸다. 또 네가 무심코 뱉은 한마디 말에 상처를 입거나 마음을 다치면 그는 그것을 마음에 품은 채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보름 동안이나 네게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기도 하는데 너는 어찌 된 영문이지 알 수도 없다. 사실 너는 그냥 생각 없이 말한 것일 뿐, 비웃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그는 그 말을 확대 해석해서 자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소한 일을 마음에 담아둔 채 끝도 없이 확대하며 과장하고, 전혀 관용이 없는 것이 바로 속이 좁은 것이다. 어느 정도로 속이 좁겠느냐? 마치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여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고, 그와 함께 있으면 늘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며, 정상적으로 대화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정상적으로 대화하다가 어떤 말 한마디로 그에게 미움을 사거나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하면 심각한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너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으며, 물건을 내리치고, 네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타이르고 달래도 소용없다. 네가 그의 옆에 앉으면 그는 모른 척 피해 버린다. 나이와 상관없이 늘 아이처럼 성질을 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속 좁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인성의 결함이며,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함께 지내기가 매우 어렵다. 형제자매들은 함께 마음을 열고 교제하며 서로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지만, 아무도 그를 지적하지는 못한다. 그와 교제하지 않으면 그는 또 못마땅해하고 불만을 품은 채 “당신들은 모두 마음을 열고 교제하고 서로 도우면서, 저는 형제자매로 여기지 않는군요.”라고 한다. 그러니 그에게 아예 말을 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당신도 무척 좋은 사람인데, 다만 가끔 성질이 좀 안 좋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잘못된 점이 있어요. 말할 때도 늘 조심하지 못하죠.” 이렇게 말하지 않고, 그를 보고 성격이 나쁘다거나 속이 좁다고만 하면 안 된다. 그럼 그는 성을 낼 것이다. 그와 함께 지내려면 몹시 조심해야 하고, 말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한마디라도 부적절한 말을 하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니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은 유달리 힘들다. 이방인들은 이런 사람을 두고 ‘유리 멘탈’이라고 한다. 매우 쉽게 상처받고, 툭하면 심기가 상하며, 울고, 끼니를 거르고, 잠을 자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는 “당신들은 모두 제가 나쁘다고 하고, 저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저와 대화하지도 않고, 저를 피하면서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네요.”라고 한다. 이런 자는 어린애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당신은 너무 유리 멘탈이라 조금만 상처 입어도 폭발하는데 누가 감히 당신을 폭로할 수 있겠어요? 누가 당신과 교류할 엄두를 내겠냐고요. 모두 두려워하죠.”라고 한다. 이런 사람의 인성을 악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는 실제로 이렇다 할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저 성질이 고약하고 제멋대로이며 따지고 들기를 좋아하고, 어린애처럼 성깔을 부려서 건드리거나 손댈 수 없을 뿐이다. 네가 그에게 관용을 베풀면, 그는 네가 자기를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를 진지하게 대하면, 그는 네가 자기에게 사사건건 따진다고 말한다. 네가 어떻게 해도 다 틀린 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지낼 때는 적절한 방식으로 잘 달랜다면, 그의 자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식이 부적절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심기에 어긋나면 그는 소극적으로 변하니,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를 달래야 한다. 속이 좁은 사람은 참 성가시다. 사소한 일로 한나절 동안 눈이 빨개질 정도로 울며, 조그만 일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참 동안 입을 삐죽거리고, 한번 성질을 부리면 보름 동안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성격이 나쁘고 속이 좁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한다. 다만 하면서 화를 낼 뿐, 기분이 좋아지면 다시 열심히 일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부류는 인성 측면의 결함과 문제가 상당히 크다. 그들은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기가 쉽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골칫거리와 부담을 안겨 주기가 쉽다. 이런 부류는 어른의 배포도, 어른의 처세 태도도 없어 마치 10대 초반의 아이 같다. 철들었다고 하자니 아직 사리 분별을 잘 못하고, 철없다고 하자니 어른스러운 말은 또 곧잘 한다. 네가 그를 어른으로 대하면, 그는 네 어떤 말 한마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박당했다며 갑자기 어린애처럼 성질을 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반대로 어린아이처럼 대하면, 그는 네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매우 비정상적이다. 이는 인성 한 측면의 결함으로, 이런 문제가 있는 사람은 변화해야 한다. 포용하고 양보하는 법을 배우고자, 올바른 방식과 태도로 문제를 대하고 처리하고자, 정상인의 이성적인 방식으로 남들과 함께 지내고자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진리와 올바른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는 휘둘리고 영향받거나 속박되고 결박되지 말고, 올바른 방식을 견지하며 행동해야 한다. 설령 힘들다고 생각될지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 또한 배움의 과정으로, 너의 인성과 식견 등 여러 측면이 조금씩 성장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성장의 표지는 무엇이냐? 많은 사람과 조화롭게 지내고, 누가 듣기 싫은 말, 놀리는 말, 혹은 네 심기를 상하게 하는 말을 해도 모두 용인하고 이해하며, 올바르게 대응할 줄 아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한 말이 듣기 좋지는 않지만 네 실상에 맞는다면,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또 누가 무심결에 불쾌하게 느껴지는 말을 했다고 해도 상대가 의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면 포용해야 한다. 만약 누가 의도적으로 너를 겨냥해 상처 주는 말을 했다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굴까? 저의가 뭐지? 그는 악인일까, 아니면 패괴 성품을 표출한 걸까? 만약 그가 악인이라면, 나는 더 분별하고 경계해야 해. 만약 그의 말이 옳고 진리에 부합한다면 받아들여야지. 하지만 그의 말이 옳지 않더라도 그와 논쟁할 필요는 없어. 만약 패괴 성품을 드러낸 거라면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봐야겠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진리를 교제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가 참을 수밖에 없어.’ 이렇게 하면 해결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면 각 부류의 사람과 서로 포용하고 돕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으니, 속이 좁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 속이 좁은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척 곤란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무리에 가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외톨이나 별종 같아 보인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너를 불쌍히 여기며, 모두 너를 돕고 싶어 할 것이다. 모두 형제자매이니, 네가 늘 그렇게 혼자 외톨이처럼 지낸다면 다들 너를 보면서 불편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왜 별종 같아 보이겠느냐? 네 인성에 그런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그것을 극복하고 천천히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성격이 나쁘고 불같은 것은 어느 측면에 속하겠느냐? (인성의 결함에 속합니다.) 성격이 나쁜 것은 성격이 불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을 인성의 결함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성격이 좋고 웃는 상이며, 늘 온화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항상 상대의 기분에 맞춰 좋은 말만 한다. 이게 좋은 것이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만약 누가 그를 가리켜 무식하다고 하면 그는 “무식하면 좋죠. 시비를 일으키지 않으니까요.”라고 하고, 대머리라고 하면 “대머리가 좋죠. 대머리는 똑똑하니까요.”라고 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대하든 성질도 화도 내지 않는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좋은 사람과 일, 나쁜 사람과 일에 대해 어떤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좋은 사람에게 동조하고 나쁜 사람을 싫어하는지 아니면 나쁜 사람에게 동조하고 좋은 사람을 싫어하는지 등에 대해 뚜렷한 관점과 입장이 없고, 어떤 일도 평가하지 않는다. 아무튼 어떤 일을 마주하든 웃어넘기며 특히 온화하고 성질을 내지 않는다. 이것이 인성의 장점이겠느냐? (아닙니다.) 성격이 좋은 것이 인성의 장점이 아니라면, 성격이 나쁜 것은 인성의 결함이겠느냐? 성격의 좋고 나쁨이 한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누가 본분을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는 것을 보아도 개의치 않고, 누가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것을 보아도 화를 내지 않으며 “괜찮습니다. 앞으로 좋아지겠죠. 천천히 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쓰고 고심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해야지, 대충 건성으로 하면 안 됩니다. 다음에는 주의하세요.”라고 한다. 성격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 집의 이익 좀 지켜 주시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사람이 되어야죠.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처신하면서 최소한 하나님 집의 이익은 지켜야 한다고요. 앞으로는 주의하십시오.”라고 한다. 이것이 성깔이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성격이 꽤 좋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마주해도 성을 내지 않는다. 또 누가 복음을 전하면서 걸핏하면 허위 수치를 보고하고 상부와 하나님 집을 속이는 것을 보면 “만약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허위 보고를 한다면, 이건 성령 역사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고요!”라고 한다. 누가 “허위 보고는 거짓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라고 반박하면 “왜 그렇게 하지 않죠? 다들 허위 보고를 하고 좋은 소식만 알리고 나쁜 소식은 알리지 않는데, 당신은 왜 바보처럼 구는 겁니까?”라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허위 보고를 하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누가 원칙을 지키며 허위 보고를 하지 않으면 성을 내고 탁자를 내리치며 “왜 허위 보고를 하지 않는 겁니까? 성령의 흐름에 반하려고 하는 건가요? 보고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해임시키겠습니다! 제명하겠다고요!”라고 한다. 이렇게 성질을 내는 것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이는 사악하게 화를 내는 것이다. 마땅히 성질을 내야 할 때는 내지 않고, 내지 말아야 할 때는 함부로 성질을 내며, 사악한 일을 정의로운 일이라고 말하고, 허위 보고를 성령의 흐름이라며 크게 찬양하고 확산시키려 하니, 이상하지 않으냐? (이상합니다.) 누가 허위 보고를 하지 않으면 탁자를 내리치고 눈을 부라리며 화를 내고, 해임하고 제명하려 하는데, 이는 ‘서릿발 같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큰 붉은 용에게는 ‘서릿발 작전’이 있고, 이 마귀가 위세를 부리는 것은 ‘서릿발 작전’이라고 하며, 그가 표출하는 것은 곧 ‘서릿발 같은 분노’이다. 허위 수치를 보고하지 않으면 탁자를 내리치며 서릿발 같은 분노를 표출하는 이런 상황에서 너희는 원칙을 견지하며 거짓이 아닌 실제 수치만을 보고할 용기가 있느냐? 직접 나서서 그를 지적하고 폭로하며, “사람들에게 허위 보고를 강요하는 당신은 마귀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허위 수치를 보고하고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성령의 흐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성령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아닙니까?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령을 모독하면서 스스로를 정의로운 천사라고 생각하고, 누가 당신 뜻을 거슬러 허위 보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화까지 내는군요. 당신은 일말의 정의감도 없습니다. 사악한 일을 폭로하고 정죄하기는커녕 진리를 지키며 허위 보고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는 대로 성질을 내고 ‘서릿발 같은 분노’를 표출하니, 이는 의도적으로 하나님 집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것 아닙니까? 큰 붉은 용의 일 처리와 성질이 같은 것 아니냐고요.”라고 말할 용기가 있느냐? 그러니 이제 다시 성격이 나쁘다는 것이 과연 인성의 결함인지, 인성의 장점인지를 보면, 단순히 한마디로 단정지을 수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일에 성질을 내고 어떤 일에 성질을 내지 않는지, 평소에 성격이 나쁜 이유가 무엇인지를 봐야 하고, 그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처신의 원칙이 있는지를 봐야 하며, 진리를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 집의 이익, 교회 사역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어떤지를 봐야 한다. 만약 그가 진리 원칙과 하나님 집의 이익,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기 위해서 각종 사악한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늘 성격이 나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인성의 장점이다. 하지만 각종 사악한 사물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물을 대할 때 자신과 무관한 양 결코 화를 내거나 성을 내는 법이 없다면, 그것은 인성의 결함이 아니라 인성이 좋지 않고 정의감이 없는 것이며, 당연히 패괴 성품에 속한다. 그러니 성격과 관련된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겠느냐? 어떤 사람의 성격이 좋다고 해서 꼭 그의 인성이 좋은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의 성격이 나쁘다고 해서 꼭 그의 인성이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을 대상으로 성격이 나쁜 것인지를 봐야 한다. 만약 사악하고 어둡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일, 하나님 집의 원칙에 어긋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해치며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에 대해 초조함을 느끼고 걱정이 돼서 수시로 화를 내고 나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성이 나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으로, 인성의 장점이다. 반대로, 이러한 부정적인 사물을 마주할 때 전혀 성질을 내지 않고, 직접 나서서 하나님 집의 이익이나 하나님의 증거를 지키지 않으며, 진리 원칙을 견지하면서 앞에 나서 제지하고 제약하지는 않은 채, 그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들이 확산되고 퍼져나가게 둔다면, 이런 사람은 언뜻 성격이 좋아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인품이 악랄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성격이 나쁜 것을 어떻게 봐야겠느냐? 무슨 일을 대할 때 성격이 나쁜 건지, 그 사람의 인품이 어떤지, 그가 추구하는 바와 걸어가는 길이 무엇인지, 진리와 하나님, 하나님 집의 사역,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 이렇게 보는 게 정확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의감은 없으면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때 성격이 불같고 화가 많으며 혈기가 왕성해서 자주 격분하고, 사소한 일로 남과 다투고 논쟁하며 심지어 욕설까지 한다면, 이는 인성의 결함이 아니라 인품이 악랄한 것이다. 패괴 성품의 차원에서 보면 그는 성품이 사납고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다. 그의 나쁜 성격은 정의로운 사업이나 긍정적인 사물, 진리 원칙,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신의 체면과 지위, 허영, 물질, 금전 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의 성격이 나쁜 것은 인품이 악랄한 것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 성격이 나쁜 것은 상황을 봐야 하며, 어떤 일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질을 내는지를 봐야 한다. 만약 자신의 이익과 체면,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한마디 말에도 크게 성질을 내고 다투며 소란을 피운다면, 이는 인품이 악랄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개인적인 이익과 관련된 일에서는 대체로 너그럽고, 사람들이 가끔 그를 겨냥해 말하고 체면을 상하게 하거나 그의 이익을 점해도 대부분은 따지거나 성질을 내지 않는다면, 사람들과 교류할 때는 그렇게 따지고 들지 않고 양보할 줄 알지만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며 하나님 집 이익을 해치는 사람을 보면 성질을 낸다면, 이는 인품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이는 인성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정의감이자 인성의 장점이다.
마음에 앙심을 품는 것, 이는 어떤 측면의 문제에 속하겠느냐? (인성의 결함에 속합니다.) 이는 인성의 결함이다. 어떤 사람이 앙심을 품겠느냐? (옹졸한 사람이 앙심을 품습니다.) 옹졸한 사람, 쩨쩨한 사람, 어린아이가 앙심을 품는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 툭하면 화를 내고, 말을 하지 않으며,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 네가 무심코 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상하면 앙심을 품고 아주 오랫동안 너를 못 본 척하며, 네가 물어봐도 말을 하지 않는다. 네가 그에게 “무슨 일입니까? 문제가 있으면 함께 해결합시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보상할게요. 혹시 제 말이 당신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저한테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해도 그는 계속 말을 하지 않고 앙심을 품는다. 이런 사람은 성가시지 않으냐? (성가십니다.) 이는 인성이 비정상적인 것이다. 인성 측면의 문제 중 인품 차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모두 인성의 결함에 속한다. 결함이란 정상 인성에 결핍된 것으로, 처신하는 태도나 방식이 비정상적이고 미숙하여 정상 인성의 이성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러면 결함이 된다. 마음에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들을 짜증 나게 하며, 함께하고 싶지 않게 한다. 한편, 이런 사람은 마치 어린애처럼 미숙하다. 보통 10대의 아이들이나 그렇게 하지, 성인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사이가 좋을 때는 마치 한 몸 같다가도, 사이가 틀어지면 낯빛을 바꾸고 앙심을 품으며 너와 말을 하지 않고, 네가 준 것들을 모두 돌려주고, 너와 절대 교류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 언젠가 화해하면 다시 한 몸처럼 사이가 좋아지니, 이는 미숙한 모습이다. 이런 모든 미숙한 모습들을 인성의 결함이라고 부른다. 앙심을 품는 것은 인성의 결함이다. 앙심을 잘 품는 사람이 어떤 본분을 이행하면, 누구보다 쉽게 일을 망칠 수 있다. 그는 누가 언제 한 말 한마디에 며칠이나 앙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또 아무리 중요한 본분이라도 너한테 한마디 말 없이 중단할 수 있다. 너는 그가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사역은 이미 중단된 지 오래인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앙심을 잘 품는 사람에게 절대 중요한 사역을 맡겨서는 안 된다. 특히 중요한 단계의 사역은 더더욱 맡기지 마라. 그는 몹시 제멋대로인 데다가 늘 감정적이며, 앙심을 잘 품고 비이성적이어서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쉽게 사역을 팽개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역을 반드시 그가 해야 한다거나 대체할 사람이 없다면, 그에게 사역을 맡기면서 감독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있다면 그에게 너무 중요한 사역은 맡기지 마라.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교회 리더 사역을 맡을 만한 자질은 좀 있지만, 형제자매의 말에 기분이 상하면 앙심을 품고 “관두겠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한테 리더를 시키세요. 저는 집에 가서 제 갈 길 가겠습니다.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어요!”라고 한다. 앙심을 품었다 하면 일을 팽개치고 떠나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으니, 이런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느냐? (믿을 수 없습니다.) 본분과 교회 사역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 언제든 팽개칠 수 있는 것, 이는 미숙한 모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본분과 교회 사역을 마치 어린애 놀이처럼 장난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숙한 모습이다. 아이들 놀이는 장난이니, 화가 났다고 그만두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회 사역이나 어떤 본분을 아이들 놀이처럼 여기며 화났다고 말 한마디로 그만두는 것은 일을 망치는 것 아니겠느냐? 이는 단순히 그 한 사람의 일만 망치는 게 아니다. 만약 그가 교회 리더라면 교회 사역이 망쳐질 것이고, 그가 이행하는 것이 중요한 본분이라면 그 중요한 본분이 망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골라서 쓸 때는 그가 앙심을 품는 사람이 아닌지 살펴야 한다. 만약 그런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얼마나 심각하겠느냐? 사역을 팽개치지는 않겠느냐? 앙심을 품고 욱해서 본분은 이행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 누가 불러도 안 오지는 않겠느냐? 이런 부류는 몹시 다루기 힘드니 절대 쓰지 마라. 그는 온몸에 가시가 나 있어서 달래도 안 되고 훈계해도 안 되며,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스로 깨닫고 이해할 때까지는 도저히 마음을 추스를 수 없으며, 이성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렇기에 패괴 성품 외에도 인성에 많은 결함이나 결점이 있으면,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소극적으로 변해 빠져나오지 못한다. 설령 약간의 의지가 있고, 진리를 추구해 구원받기를 원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합격한 피조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움이나 불쾌한 일을 마주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려면, 반드시 진리로 인성적 결함과 결점을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또 이러한 인성적 결함을 극복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극복할 의지가 충분하지 않다면, 네 앞에 놓인 어려움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개인의 이러한 결함조차 변화시키거나 돌파하지 못한다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제 늘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늘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은 어떤 문제에 속하겠느냐? (인성의 결함에 속합니다.) 그것이 정말 인성의 결함이겠느냐? 늘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은 인품의 문제다. 채소 한 뿌리, 종이 한 장, 물 한 병까지 어떤 이득이든 취하려고 하는 것은 인품의 문제고 인품이 나쁜 것이지, 인성의 결함이 아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런 부류는 인품이 나쁘고 인격이 저열해서,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늘 깎으려 들고 할인되냐고 물으며, 시장에서 장을 볼 때도 몇 푼 안 되는 물건을 두고 끝까지 티격태격하고, 숙박업소에서 일회용 수건이나 칫솔, 치약을 무료로 제공하면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 간다. 하나라도 빼놓을까 봐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는 가난해서 늘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런 부류는 그저 그런 인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집에 돈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그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을 믿은 후에 하나님 집의 이익까지 차지하려 든다. 어떤 이는 자기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늘 접대 가정에 가서 밥을 얻어먹으며 마치 그 집을 도와주는 양 행세한다. 또 형제자매의 물건을 몰래 쓰고, 자기 옷은 입지 않고 늘 남의 옷을 입으며, 남이 빨래하는 것을 보면 ‘마침 잘됐다’며 두어 벌 빠는 것을 도와주겠다더니 결국 자기 옷 일고여덟 벌을 상대에게 빨게 한다. 이는 분명 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그는 이런 인품을 지니고 있다. 자기 집에 분명히 돈이 있으면서도 형제자매에게 돈을 빌리고, 사람들이 언제 갚을 거냐고 물으면 “돈이 생기면 갚겠죠. 돈이 없는데 어떻게 갚겠습니까? 돈은 없지만, 이 목숨줄은 하나 있네요!”라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갚을 생각도, 계획도 없이 그저 이득을 보고 남의 돈으로 마음껏 누리고 쓰려는 목적임이 분명하다. 누가 새 물건을 샀다 싶으면 관심을 보이며 빌리려 들고, 상대가 자기가 쓰려고 안 빌려주겠다고 하면 억지로 빌리며, 쓰다가 낡고 망가져도 돌려주지 않은 채 자기 물건인 양 쓴다. 이런 부류는 가는 곳마다 이득을 취하고, 빌린 물건을 돌려주는 법이 없다. 이것이 인성의 결함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인격이 저열하고 인품이 나쁜 것이다. 이런 부류를 본 적이 있느냐? (본 적 있습니다.) 이런 부류는 꽤 많다. 이런 부류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는 대부분 어떤 사람이겠느냐? 양아치 아니겠느냐? 남의 이익을 얼마나 점하든 양심의 참소를 느끼지 못하는데, 이런 자에게 양심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양심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가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는 논하지 않겠다. 그는 최소한 진리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인성 기준과 인성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이전에 교제했듯,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려면 최소한 양심을 갖춰야 한다. 사람의 양심 속에는 염치가 있다. 늘 남의 이익을 점하면서도 양심에 참소받지 않는 사람에게 염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염치 없는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악을 행해도 지각하지 못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못하기에, 정의로운 일을 하거나 올바른 길을 걷는 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인성에는 그런 측면에 대한 수요가 없는 것이다. 그의 수요는 무엇이겠느냐? 언제나 자기 이익이 손해 보지 않도록 지키는 동시에 남의 이익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신을 위해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인성에 이런 일에 대한 어떤 가책도, 참소도 없고 염치도 없기에 진리를 실행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인생 신조는 ‘나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하나도 포기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의 좋은 것, 가치 있는 것은 항상 차지하거나 빼앗고, 심지어 꿀꺽하겠다. 기회가 생기는 순간 남의 좋은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고,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 신조다. 그들은 이런 신조에 지배되기에 남의 이익을 차지하고 빼앗아도 마음이 편안하며 큰 성취감을 느낀다. 만약 이득을 보지 못하거나 이득 볼 기회를 놓치면 실패했다고 느끼고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이득을 보면 마음이 흡족하고 통쾌하고 평안해지지만, 이득을 보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이런 이득을 그냥 놓칠 수는 없지.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면 내가 손해 보지 않겠어?’라고 말이다. 보아라. 이런 신조에 지배되는데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할 때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체면이나 지위 등 정신적인 것들, 그리고 물질적인 것들은 전부 사람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어서 진리를 실행할 때는 이런 것들을 저버리고 공격하고 벗어 버리고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늘 이득을 보려는 이 부류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체면과 지위를 내려놓을 수 없고, 물질적 이익을 내려놓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는 진리를 실행할 때 위에서 말한 단 한 가지도 해내지 못하는데,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진리를 실행하게 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좋은 것들을 자기가 차지하려 하고 줄곧 놓지 못하는데, 이는 하필 진리 실행의 원칙과 충돌하고 배치되기에, 진리를 실행할 수 없다. 늘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이득을 취하려 하겠느냐? 남의 집에 방문했다가 돌아가기 전에도 꼭 그 집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좀 먹고 가야 한다. 이런 인품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어떤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자신이 이득을 보고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를 원칙으로 한다. 이익은 그가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원칙이다. 그는 오직 남의 이익을 차지하는 것만 신경 쓰며, 손해 보지 않고 이득을 보기만 하면 만족한다. 그는 사람으로 처신할 때는 이득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늘 이득을 봐야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만약 이득을 보지 못하면 그건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의 처신 기준은 오직 ‘이득을 보느냐, 그러지 않느냐’이다. 이런 방식으로 처신의 기준을 삼는데 그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진리가 자리 잡을 수 있겠느냐? 진리가 권세를 잡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어떤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진리도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떤 진리도 실행할 수 없으며, 그의 인격은 너무도 비천하여 경멸스럽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 하나님 집이 생활용품을 나눠 주면, 사실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다 썼다는 핑계를 대고 더 받아 간다. 왜 늘 받아 가려고 하겠느냐? 그는 ‘내가 이익을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볼 텐데, 그럼 손해 아니겠어?’라고 생각한다. 보아라. 이것이 어떤 인격이냐? 이런 부류가 모든 일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득을 볼 수 있는지, 이익을 차지할 수 있는지를 원칙으로 한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이익뿐, 네가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아무리 교제해 줘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그의 자질이나 이해력과는 상관이 없다. 그는 처신의 신조에 문제가 있기에 긍정적인 사물을 절대 받아들이거나 실행하지 않고, 진리 원칙도 지키지 않는다. 그의 인격은 너무도 비천하다. 이런 부류에게 진리를 교제해 줄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는 영원히 진리를 실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성에 양심과 지각이 없고, 진리를 실행하기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이득을 보는 것 하나뿐이다. 이런 부류는 아예 진리를 들을 자격도, 구원의 말씀을 들을 자격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너희는 늘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것이 어떤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줄곧 그것이 인성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성의 결함이냐? (아닙니다.) 이제 이해가 되었느냐? 그것은 어떤 문제냐? (인품의 문제입니다. 그런 부류는 인격이 비천합니다.)
이제 선행을 즐기는 것에 관해 말해 보겠다. 만약 사람이 선행을 하면서 어떤 목적도 없다면, 그것이 단순히 일종의 행위나 일상생활 속 흔한 행동 방식에 불과하다면, 그런 선행은 분명히 인성의 장점일 것이다. 주는 것이 확실히 받는 것보다 낫다. 선행을 하는 사람은 최소한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있고, 인성에 선한 성분이 있다. 그는 인색하지 않고, 물질적인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 여분의 물건이나 자신은 쓰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쓰기 적절한 물건을 기부하여 타인의 삶에 여유와 편의를 더해 준다. 이런 일을 하는 출발점에서 보면, 선행을 즐기는 부류는 최소한 인성이 선량하며, 남을 동정하고 가엾게 여기는 실질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이는 인성의 장점이다. 이런 부류는 상대적으로 인품이 좋다. 남의 이익을 점하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남의 물건을 차지하는 악인에 비하면 훨씬 낫고 인격도 훌륭하다. 그는 선행을 베풀어 남을 도와주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들이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해 주거나 좋은 평판을 남기기를 원치 않는다. 그저 이러한 처신 태도와 생활방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누가 옷이 없는 것을 보면 바로 남는 옷을 그에게 입으라고 주고, 누가 집이 가난해서 수시로 배를 주리면 자기 집 쌀을 갖다줘서 배를 채우게 한다. 또 새 컴퓨터를 사면 다른 사람의 컴퓨터가 거의 못 쓸 지경인 것을 보고는 자신의 오래된 컴퓨터를 쓰라고 준다. 그는 물건을 주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인품으로, 이는 인성의 장점이자 좋은 인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선행을 즐기는 행위는 훌륭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선행을 즐긴다는 이유로 늘 ‘나는 선하고 존귀하고 아량이 넓어. 많은 사람이 내 선행과 도움 덕에 삶이 나아졌으니, 나는 하나님께 구원받을 대상일 거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면 누구를 구원하시겠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늘 ‘나는 선행을 즐기는 좋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누가 “당신도 인성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하는 많은 일이 진리에 어긋나죠. 게다가 당신은 진리를 좋아하지도 않잖습니까.”라고 말하면 화를 낸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어떤 사람은 집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서 주변 형제자매들이 모두 그의 덕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늘 ‘나는 교회에서 이 사람들에게 박하지 않게 대했어. 그들은 모두 나한테서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고. 그러니 나는 그 사람들 마음속에서 위신과 지위가 있지 않겠어? 내가 교회에서 가장 자질과 인성이 뛰어난 사람 아닐까? 내가 리더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형제자매들 모두 내 말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패괴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조금의 선행만 해도 자기 주제를 모른 채 그것을 밑천으로 늘 교회 리더가 되고 싶어 하고, 들떠서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이 폭로한 각종 패괴 성품을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지는 않고 자신은 선행을 즐기니 좋은 사람이고 패괴 성품이 없다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자기는 교회에서 리더나 모범이 되어야 하고 형제자매들은 모두 자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습은 무엇이냐? (패괴 성품입니다.) 이는 패괴 성품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선행을 즐기는 것이 인성의 장점이기는 하나, 그로 인해 자신은 좋은 사람이니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규정하는 그런 사상과 관점이 옳겠느냐? 그는 선행이라는 좋은 행위를 인품이 좋고 인격이 고귀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 선행을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여기니 크게 잘못되었다. 이는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주제 파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선행을 즐기는 것은 사람의 한 가지 좋은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선행을 즐기는 사람은 기껏해야 인품이 상대적으로 괜찮고, 이득을 취하는 사람보다 좀 나을 뿐이다. 단, 너에게 선행을 즐기는 좋은 행위가 있다고 해서 너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고 패괴 성품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또 네게 진리 실제가 있다거나 교회 리더가 되어 남들 위에 서고 사람들을 부릴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사람의 교만한 성품이다. 비록 네게 선행을 즐기고 사람들을 돕는 등 좋은 행위가 있다 해도 이는 인성의 장점일 뿐, 네게 패괴 성품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만약 네가 선행을 즐기고 사람들을 돕는 것을 밑천 삼아 교회의 리더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야망을 갖는다면, 이는 패괴 성품이다. 구별이 되느냐? 인품이 좋다고 해서 패괴 성품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과 교류할 때 기본적으로 괜찮은 편이다. 남의 이익을 점하지 않고, 선행을 베풀며 도움을 주는 등 여러 인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한동안 교류해 보면 그 사람이 매우 교만하고 거들먹거리며, 때로는 거짓말을 하고 무척 간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네가 그를 지적하기라도 하면 그는 받아들이기는커녕 사나워지며, 심지어는 탁자를 내리치며 말한다. “제가 하나님을 믿은 그 오랜 세월 동안 제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형제자매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제가 누구의 이득을 점한 적이 있는지. 누구를 속이거나 해한 적이 있는지!” 아무도 속이거나 해하지 않았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겠느냐? 남을 해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최소한으로 해야 할 일 아니더냐? 뭘 으스대는 것이냐? 누군가를 속이거나 해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밑천이 아니다. 또한, 남의 이익을 점하지 않았다고 해서 네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너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른 이의 지적과 도움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성을 갖춘 사람이다. 지금 네가 책망 훈계를 받는 것은 패괴 성품을 드러냈고, 네가 한 일이 진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행을 즐기는 좋은 행위가 긍정적인 사물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네 인품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네가 잘못을 저질렀고 진리 원칙을 어겼기에 책망 훈계하고 폭로하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너는 진리를 사랑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네가 베푼 선행은 고작 인성 측면의 장점에 불과하다. 패괴 성품 속의 교만함, 흉악함, 사악함이 주도권을 잡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라는 사람은 너무도 비천하고 무가치한 사람일 것이다. 책망 훈계를 받을 때면 난리를 치고, 자격을 운운하며, 이미 지나간 그 알량한 좋은 행위를 들먹이고, 미친개처럼 발버둥 치고 날뛰다가 겨우 남아 있던 그 좋은 이미지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니 본성이 철저히 드러나게 된다. 그럼 사람들은 똑똑히 보고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패괴 성품이 심각하군요. 악인이고 막돼먹은 사람입니다! 그를 교회 리더로 뽑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가 정말 교회 리더가 되었다면 아무도 사자 수염을 건드릴 수 없었겠죠. 누가 그를 교체하기라도 하면 그는 상대와 끝까지 목숨 걸고 싸울 테니까요. 그럼 큰일 아닙니까!” 한 가지 좋은 행위나 한 부분의 인품만 봐서는 그의 패괴 성품이 어떠한지, 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지, 진리에 순종할 수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패괴 성품이 드러난 후 폭로와 책망 훈계를 거쳐야 진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인품이나 인성의 장단점은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완전히 결정하지 못하며, 인품이나 인성의 장단점으로는 진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지를 간파할 수 없다. 그가 패괴 성품을 드러내거나, 폭로와 책망 훈계를 받을 때가 되어야 진리에 대한 태도가 드러나며, 그제야 그가 진리를 사랑하고 실행할 수 있는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희망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있다. 선행을 즐기고 남을 도와주는 모습으로 그의 인성에 어떤 장점과 결점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또 선행을 즐기고 남을 도와준다는 이유로 자만하고 독선적으로 굴며 리더가 되어 남들 위에 서려 하는 일련의 문제를 통해 진리에 대한 그의 태도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근거하면, 그가 구원받는 결과에 이를 수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가 지닌 인성의 장단점과 인품을 분별하는 동시에, 인성과 패괴 성품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그가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지, 결과가 어떨지를 100% 알 수는 없다. 구원받을 수 있을지를 보는 것은 더 복잡해서, 사람이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진리를 받아들이고 반성할 수 있는지, 진실로 회개하는지 등 여러 측면에 근거해야 한다.
사교성이 좋은 것은 어떤 측면에 속하겠느냐? (선천적 조건에 속합니다.) 이는 선천적 조건으로, 사람이 인간 사회에서 처신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어떤 이는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고 지치지 않으며, 어떤 성격의 사람과도 교류할 수 있고 또 교류하기를 원한다. 반면 어떤 이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하고, 남들과 교류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는 타고난 성격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성격과 관련되니, 당연히 선천적 조건과 관계가 있다. 사교성은 사람의 성격과 관계가 있을 뿐, 인성의 장단점과도, 당연히 패괴 성품과도 관련이 없다. 이것은 꽤 간단하다. 그럼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어떤 측면에 속하겠느냐? (타고난 성격에 속합니다.) (인성의 결함에 속합니다.) 이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도대체 어떤 측면의 문제겠느냐?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성격이 별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성격이 좋지 않은 것은 인성의 결함이며, 성격 자체도 선천적 조건의 한 측면이다. 그래서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선천적 조건이기도 하고 인성의 결함이기도 하다. 이는 패괴 성품에 속하지 않으며, 사람됨과도 관련이 없다. 사교성이 부족한 것은 늘 사람들을 피하고,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교류하기를 꺼리며, 혼자 일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도 싫어하고, 오직 고립된 환경이나 구석진 곳에 있는 것만 좋아하는 것이다. 또 사람들이 많을 때는 말하기를 꺼리고 소통도 서툴며, 사람들과 교류할 때는 불안해지고 공포에 질리거나 난처해하고 어색해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는 선천적 조건 중 성격의 문제이며, 물론 인성의 결함과도 관련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제 겁이 많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선천적 조건입니다.) (인성의 결함입니다.) 이는 선천적 조건이자 인성의 결함이다. 무엇을 가리켜 겁이 많다고 하겠느냐?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못하고, 쥐와 지네, 전갈을 무서워하며,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면서 복잡한 일을 마주하기를 꺼리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겁이 많은 모습이다. 혹자는 뱀만 보고도 놀라 기절하고, 혹자는 어디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만 들어도 놀라서 온몸을 떨고 두려워하며, 혹자는 하나님을 믿다가 박해받고 잡혀가 옥살이를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겁에 질려 하나님을 믿을 용기를 내지 못한다. 또 혹자는 롤러코스터를 타지 못하고, 이해가 되지 않거나 해 보지 않은 일은 참여하거나 시도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는 위험한 일이나 활동만 도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평소 정상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조차 두려워한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우라고 하면 그는 “저는 운전할 용기가 안 납니다. 길에 차가 너무 많고, 속도도 너무 빠른데 만에 하나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쩝니까?”라고 말한다. 누가 “왜 늘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을 하는 겁니까? 좀 조심하면 되지 않겠어요?”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두려워하며 “차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정말 사고가 나면 아무도 어쩌지 못하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는 항상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한다. 겁이 많은 것은 선천적 조건이자 인성의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겁이 많은 사람은 모든 일을 조심조심 하기에 일반적으로 큰 실수나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장점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단지 인성의 한 가지 결함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담함은 어떻겠느냐? 대담함은 보통 어떤 단어들과 관련이 있느냐? (‘만용을 부린다, 무모하다.’ 등의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모하다, 간이 크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 등의 표현이 대담하다는 뜻을 지닌다. 그럼 대담한 게 과연 좋겠느냐? (어떤 일에 대해 대담한지를 봐야 합니다.) 상황을 봐야 하고, 어떤 부류인지를 봐야 한다. 인성 측면에서 대담함을 바라보자면, 그것은 장점이라고도, 단점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선천적 조건에 포함된다. 사람의 대담함은 어떤 일에 대한 것인지, 일을 처리할 때 마지노선이 있는지가 중요하며, 또 그의 인품이 어떤지도 알아야 한다. 만약 인품이 나쁜데 대담하다면, 법을 어기고 악행과 범죄를 저지르며 도처에서 이익을 취하고 사기를 칠 수 있다. 또 누가 돈을 주며 나쁜 짓을 하라고 매수해도 할 것이다.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면 어떤 나쁜 짓도 서슴지 않고 하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며 타인을 고려하지도 않는, 이런 무모한 사람이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사업을 하겠다며 사방에서 사기를 치는데, 사실 그의 사업은 불법이고 실체 없는 페이퍼 컴퍼니다. 하지만 그는 대담함과 사기 수법으로 한순간에 큰돈을 벌어 별장에 살고 고급 자동차를 타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다. 그가 누리는 돈과 물질적인 것들이 대담함으로 인해 사기 쳐서 얻은 것이라면 이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너희는 이런 대담함이 좋다고 생각하느냐?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대담한 사람을 볼 때는 그가 어떤 길을 걷는지를 보아야 한다. 대담함 때문에 사기와 사취를 감행한다면 이는 큰 악행이다. 많이 속이고 남의 이익을 점할수록 나중에 받는 더 큰 징벌을 받지 않겠느냐? 이는 재앙을 불러오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겁 많은 사람이 사기를 치려 한다면, 사기 규모가 작아서 나중에 받는 징벌도 가벼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바른길을 걷지 않는 자들에게는 겁이 많은 게 좋겠느냐, 대담한 게 좋겠느냐? (겁이 많은 게 좋습니다.) 바른길을 걷지 않고 사기를 치는 부류는 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늘 법의 허점을 노려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 하고, 언제든 법을 어길 수 있다. 이런 부류에게는 대담함이 재앙이며, 인성의 결함이자 병폐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겁이 많은 게 좋은 것이고, 보호가 된다. 소심한 사람은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의 돈을 벌고 약간의 사치품을 누리면 그만이라, 나중에 받는 징벌도 가볍다. 한편 대담한 사람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남을 속이며, 자신의 더 큰 향락을 위해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다. 남의 이익을 취했다면 나중에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그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받게 될 징벌은 더욱 커질 테니, 한두 생 안에는 갚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한평생 식당을 운영하거나 장사를 해서 수백만 혹은 수천만 위안의 자산을 모으지만, 자신은 조금도 누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빚 갚는 데 써 버린다. 70~80대가 되어서도 빚을 다 갚지 못하니 어떻게 된 일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다. 지난 몇 번의 생에 남의 것을 너무 많이 탐하고 취했기에, 이번 생에 계속해서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전생에 욕심이 너무 크고 지나치게 대담해서 남의 이익을 많이 취했기에 이번 생에 그 대가를 치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바른길을 걷지 않는 사람에게 겁이 많은 것은 보호가 되고, 대담함은 좋지 않은 신호가 된다.
사람이 바른 길을 걷는다면, 대담한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무엇이 좋겠느냐? (대담하면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담함이란 단순히 육적인 담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만약 육적인 담력이라면, 그런 종류의 대담함은 무모하고 경솔하며, 다소 충동적이고 맹목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대담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다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이삼십 년 옥살이를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만약 두렵다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모한 것으로, 진정한 대담함이 아니다. 무모하지 않은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용기를 냈고, 진실한 믿음도 있었다. 이 진실한 믿음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을 믿는 데 의지와 결심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다가 핍박받고 체포되어 고문당해도 목숨을 걸고 버틸 거야. 얼마나 고통받든, 어느 정도로 고통받든 절대 교회를 배반하거나 유다가 되지 않겠어.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한편, 네가 정말 체포와 핍박에 직면했을 때, 큰 붉은 용이 너를 위협해 교회를 배반하라고 할 때, 사탄의 간계를 꿰뚫어 보고 그것에 통제되지 않으며, 줄곧 굳게 서서 증거하며 “사람의 모든 것과 생사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으니,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무모한 것도, 담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진실한 믿음이다. 네가 이런 진실한 믿음을 갖고 굳게 설 수 있다면, 그것은 네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진실한 믿음 없이 “나는 두렵지 않아. 죽기밖에 더 하겠어?”라고 말하다가 막상 체포되면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싸고, 체포된 후에는 먼저 ‘고문을 당할까? 내 몸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전기고문을 당하면 버틸 수 있을까? 고문이 심해지면 죽는 거 아냐? 죽으면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실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정말 못 견디겠으면 교회를 팔아넘기고 유대가 되자. 유다가 된 후에 징벌받고 파멸되어도 상관없어. 최소한 눈앞의 고통은 모면할 수 있잖아.’라는 생각부터 든다면, 이미 증거를 잃은 것 아니겠느냐? 만약 공산당이 너를 위협하며 네 가족을 협박한다면, 네 자식이 대학에 가지 못하게 하고 네 부모가 의료보험을 누리지 못하게 하며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면, 너는 두려워하며 진실한 믿음을 잃을 것이다. 네 용기는 어디로 간 것이냐? 네가 정말 대담한 사람이겠느냐?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네 대담함은 무모한 것이다.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네 대담함도 진실해진다. 체포되기 전에 ‘하나님은 내가 체포되게 하지 않으실 거야.’라고 생각하며, 이런 생각이 들자 대담해졌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기와 믿음이 아니다. 만약 네가 체포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밝히 깨닫고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 손에 달려 있어. 하나님께서 정말 내 목숨을 거두신다면 나는 순종해야 해. 앞으로 어떤 종착지를 맞이할지는 하나님의 한마디로 정해지는 거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어떤 종착지를 주시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니, 나는 순종할 거야. 만약 하나님이 나를 감옥에서 죽게 하신다면 그건 내 영광이지. 나는 이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어. 아무리 큰 고통을 겪어도 나에게는 변하지 않는 신조가 하나 있어. 바로 내 목숨을 하나님 손에 맡기겠다는 거야. 사탄이 아무리 괴롭히고 유린하고 고문해도, 나는 사탄과 타협하지 않을 거야. 죽을까 봐 걱정되지는 않아. 설령 죽더라도 그건 하나님이 주재하고 정해 주신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할 거야!’ 너는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체포되지 않고 사실이 임하지 않았을 때, 이런 일들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과 순종을 가지며, 생사의 일에 대해서도 진실한 인식과 수용을 갖고,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손에 맡길 수 있다면, 실제로 체포되어 생사의 기로에 놓였을 때 마음속의 이러한 인식이 변하지 않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무너지거나 꺾이지 않는다면, 네 용기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체포되기 전이나 사실이 임하기 전에 이런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나는 목숨을 바치고 싶어. 내 목숨은 하나님이 주신 거야. 기껏해야 죽어서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밖에 더 있겠어!’라고 생각한다면, 큰 붉은 용이 잔인하게 고문하고 10년 형을 선고할 때 혼란에 빠질 것이다. ‘죽으면 다 끝일 줄 알았어. 순교하면 하나님께 기억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이 증거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10년 형까지 선고받았네. 10일이나 10개월이 아니라 10년이라고. 이걸 어떻게 버티지?’ 여태까지 이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제 와서 생각한다면 깨닫기가 쉽겠느냐? 조금 어렵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 사람은 그저 어떻게 대처하고 벗어날까 하는 것만 생각한다. 어려움에서 벗어나려는 힘이 크면 곤경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적응하는 힘은 매우 작아진다. 그래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런 환경에 순종하기가 몹시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속히 진리를 구하고, 이런 일들을 분명히 생각해 두어야 한다.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할지, 그 길도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0년을 감옥에서 보낸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아내(남편)가 나와 이혼하지는 않을까? 10년 후에 우리 아이는 얼마나 커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나를 못 알아보고 앞으로 나를 부양해 주지 않는 것 아닐까? 출소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10년 후에는 부모님도 나이가 드실 텐데, 나는 부모님께도 효도를 못 했으니 불효자가 되는 것 아닐까? 10년 후에는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지 않을까? 나는 감옥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 예배도 참석하지 못하고 설교도 듣지 못하고 진리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 10년 동안 낙오되는 것 아냐? 그건 도태되는 것과 같지 않을까? 하나님이 나를 원하실까? 이런 고난을 겪었는데 하나님이 기억해 주실까? 만약 기억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하겠지. 그럼 이 감옥살이는 헛된 것 아닐까? 10년 동안 세상은 크게 변할 텐데,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겠구나.’ 여기까지 생각하니 어려움이 밀려온다.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직면해야겠느냐? 하루하루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이런 일들을 분명히 생각하지 못하고, 진리를 깨달아 일을 밝히 알지 못한다면, 체포될 상황에 처하는 순간 생사가 한순간의 판단에 좌우된다. 한 순간의 두려움과 걱정, 생각과 사고가 너를 유다로 만들어 교회를 팔아넘기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 있다. 이 일을 명확히 생각하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의 생사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생사의 일에 있어 꿰뚫어 보지 못하고 요행을 바라며 대충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면, 환경이 닥치는 순간 드러날 것이다. 체포된 사람들 중 일부는 하룻밤 사이에 유다가 되어 ‘삼서(三書)’에 서명하고, 사탄에게 낙인이 찍힌다. 사람의 생사는 때로 한순간의 판단에 좌우되며, 진리 없이는 난관을 통과하기가 몹시 힘들다. 그렇다면 진정한 대담함이란 무엇이겠느냐? 순간의 용기로 어떤 일을 해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대담함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것은 충동일 뿐이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많은 긍정적, 부정적 사물을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 긍정적인 사물을 내면에서 통과하고 받아들이고 확신하며, 하나님의 주재와 진리에 순종하는 수준에 도달할 때, 너는 비로소 진실한 용기를 갖게 된다. 만약 네 마음에 이런 것들이 없다면, 네 그 용기는 그저 무모한 만용으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국가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면 단순히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라, 더 나아가 믿음이 필요하다. 네가 용기 있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담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저는 대담하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도 어느 정도는 맞을 수 있다. 너는 간이 커서 하나님을 믿는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네 어리석음과 무지, 순수함을 보고 네게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몇 가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진리의 양육과 공급을 더해 네가 적잖은 진리를 깨닫고 얻게 한다. 그리하여 점차 네 무모한 만용 속에서 진실한 믿음의 성분이 생겨나고, 네 용기는 더욱 커져서 앞으로 닥칠 환경이나 박해를 더 용감히 대면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진실한 믿음 없이 한때의 만용에 기대 “나는 용감히 하나님을 믿을 거야. 난 박해받는 것도,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것도 두렵지 않아!”라고 한다면, 그 용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진리의 공급이 없고, 하나님이 실생활 속에서 환경을 마련해 너를 훈련하고 연단하며 각종 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네 그 대담함은 순전히 무모한 만용일 뿐, 결코 진실한 믿음은 아닐 것이다. 이해했느냐? (이해했습니다.) 만약 정말 무모한 만용이라면, 그 사람은 그저 경솔하고 어리석으며 무지한 사람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너무 단순한 사상을 갖고 간단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을 따르는 데 어떤 위험이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가 결국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그것이 간단한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만약 대담함이 인성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대담한 사람은 최소한 단순하고 순수하고 복잡하지 않으며,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대담함이 복받으려는 속셈에 지배된 것이고 ‘하나님을 믿으면 나중에 천국에 들어가 큰 복을 받고, 재난을 피해 죽지 않을 수 있어. 그러니 나는 하나님을 믿을 거야. 내 모든 걸 걸고!’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무모한 만용에 지배되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믿는 게 아니라, 복을 얻기 위해 달려간다면, 네 그 대담함은 기껏해야 무모한 만용일 뿐, 인성의 장점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담한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인성의 본질이 어떤지를 봐야 한다. 만약 그에게 어떤 양심도 이성도 없다면, 그는 그저 무모한 만용을 가진 사람일 뿐, 아무 가치가 없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만약 대담한 사람이 이해력이 전혀 없고, 진리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오직 복을 받기 위해서만 하나님을 믿으며, 복을 받기 위해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성의 장점이 아니라 잘못된 사상과 관점일 것이다. 그 잘못된 사상과 관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용기가 있든 없든 그것은 모두 사람의 선천적 조건과 관련된 것으로, 인성의 본질과는 큰 관련이 없다.
선천적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 모습에 대해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스스로 분별할 수 있겠느냐? (단순한 것은 분별할 수 있겠지만, 좀 복잡한 것은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선천적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차이를 교제했으니 이제 분별할 수 있겠느냐? (예전보다는 조금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 조금 특수한 예를 든다면, 내가 교제한 바에 근거하여 분별할 수 있겠느냐? 확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니 이제는 각 측면의 문제를 교제해 보자. 교제를 많이 하면 여러 측면의 문제를 어떻게 분별할지 규칙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인성, 선천적 조건,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 모습 중 교제한 적이 있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분별할 수 있겠지만, 교제하지 않은 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거나 진리를 구하는 사람만이 조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할 테니, 더 많이 듣고 물어봐야 한다. 이런 문제들을 교제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영원히 모호하게 남을 것이고, 말할 때도 애매할 것이며, 너희의 인식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인식과 항상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오늘은 자질에 대해 교제하였다.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 분별할 수 있겠느냐? (대략적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지 못하겠다면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일상생활에서 이런 일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오늘 교제한 말씀들을 실생활에 가져와 사람들의 모습과 조금씩 대조하면서 자신도 분별하고 남도 분별하며, 자신을 알아가고 남도 알아가다 보면 점차 가늠이 되고 기준이 생길 것이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는 원칙도 점점 더 명확해질 것이다. 선천적 조건, 인성, 패괴 성품의 여러 측면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 교제했다. 어떤 측면의 모습이나 인성의 어떤 표출이라도 모두 공허하지 않으며, 너희가 실생활에서 접하고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대조하며 각 부류의 일과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교제한 여러 내적 상태와 문제들을 실생활에 가져와 대조할 수 있어야 조금씩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함에 있어 성장할 수 있고, 진리와 관련된 여러 측면의 문제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으며, 각 측면의 진리 원칙도 점차 파악할 수 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우리가 말한 문제들은 주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내적 상태와 표출을 분별하기 위한 것으로, 직접적으로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하게 해 주지는 않지만, 너희가 진리와 진리 원칙을 인식하고, 거기에 진입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들이 사람의 관념으로 볼 때는 마치 인성이나 선천적 조건, 또는 눈에 띄는 패괴 성품과 관련된 것 같아도, 어떤 문제든, 어떤 가르침이든 모두 사람의 진리 진입과 관계가 있으므로 사람이 진리에 진입하는 길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할 것들이며, 피할 수 없다. 인성의 각 측면 문제와 모습들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전부 너희가 일상생활의 여러 환경에서 직면하고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만약 너희가 각종 문제에 직면했을 때 분별할 줄 모르고 일반화하여, 우리가 교제한 이 진리 원칙들을 규례나 도리로 여긴다면, 결코 진리 실제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영원히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다음에 보자!
2023년 11월 25일